▲ 대리마을 주민 조용식(63) 씨가 상수도 옥내배관 설치 작업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집 마당에서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군데군데 헤집어진 땅과 부서진 담벼락 사이로 중장비의 소음과 자욱한 먼지가 오고 갔다. 나뒹구는 콘크리트 자재를 피해 다니는 주민들의 걸음이 위태롭다. 지방상수도확충 사업이 시작된 지 일주일, 김해 주촌면 원지리 대리마을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김해시는 지난달 구제역 가축 매몰지가 밀집한 5개 마을을 대상으로 상수도 설비를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의 주 식수원인 지하수가 침출수에 의해 오염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 대리마을은 첫 번째 대상이었다. 시가 사업을 시작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쾌재를 불렀다. 마을 주민 김화준(77)씨는 "구제역 발생 직후, 시가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했다"고 기뻐했다. 지난 1월 29일 마을 하천에서 침출수가 발견된 직후부터 주민들은 자비를 털어 생수를 사서 마셔 왔다.
 
시는 상수도 사업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했다. 노인들은 글도 잘 안 보이는 눈으로 서둘러 신청서에 이름을 적어 냈다. 하지만 며칠 뒤 주민들은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사가 끝난 뒤, 수도꼭지를 아무리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가 집 앞 도로나 마당에 설치된 계량기까지만 상수도 배관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마당에는 물이 나오는데, 정작 집 안은 물이 나오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시는 "법적으로 집 안에서 물을 쓰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람이 개인 부담으로 집 안 옥내배관 공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배관 공사는 마당의 넓이나 배관 상태에 따라 크게는 150만원의 비용이 든다. 농사가 주 수입인 마을엔 이 정도의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가구가 별로 없다. 마을 주민 이정자(가명·58)씨의 한 달 수입은 100여 만 원 남짓.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공장에 다니면서 아들과 단 둘이 생계를 꾸리는 그녀의 집은 마을에서도 제일 낡았다. 배관이 낙후된 탓에 업자는 공사비용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
 
다른 주민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부담하게 된 조용식(63) 씨는 포클레인 두 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집 마당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 씨는 "포클레인 한 대당 40만원을 달라고 하고 인건비랑 도로 포장비까지 계산해보니 10m당 최소 10만원은 잡아야 될 것"같다며 "밭을 조금 부쳐 먹고 사는 처지에 갑자기 돈을 어디서 구해야 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의 태도는 냉정하다. 김해시청 급수과 관계자는 "주민들의 반발은 구제역을 핑계 삼아 낙후된 주택시설을 정비하려는 데 불과하다"며 "법적으로 마당까지만 배관설비를 하는 것이 맞고, 이를 어기고 집 안까지 배관시설을 넣어주는 것은 시가 개인 주택에 도배를 해주는 것 같은 상황으로 과잉 행정"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다보면, 변기청소까지 요구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구제역으로 몸살을 앓았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주촌면 원지리 대리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구제역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은 돼지 사육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주민 대부분은 평생 돼지를 한 마리도 가져본 적이 없다. 모두 31세대가 살고 있는 마을에 돼지를 사육하는 집은 고작 5가구뿐이다. 시뻘건 핏물의 기억을 채 잊지 못하는 주민들은 또 다시 상수도 설치 요금이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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