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리며 앞으로 확 다가와 얼굴을 감싸는 것 같았다.
판화기법을 응용한 작업을 하는 노재환 화가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었다.
환상적인 색감, 그 색의 향연을 부드럽게 펼쳐내는 이 작품들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은 미시세계를 크게 확대해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환한 햇빛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 느껴지는 빛의 잔영들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그림 같기도 했다. 노재환 작가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그의 화실 '홍대미술학원'을 찾아가 보았다.

어릴적 만화가의 꿈이 서양화·판화로
1996년 부일미술대전 대상 수상

마블링과 다양한 미술기법으로 작업
의도된 즉흥 통한 새로운 예술 모색


노재환의 화실은 장유 율하동 중앙하이츠아파트 맞은편 율하1로 110의 6층에 있는 홍대미술학원이다. 그는 매일 아침 화실에 가서 오전과 저녁~늦은 밤 시간대에 작업을 한다. 오후에는 수강생들을 가르친다. 

화실에 들어가면 노재환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블링 기법에 다른 다양한 기법을 더하는 그의 작품은 화려하다. 화실에 들어섰을 때 노재환은 주사기에 연한 초록색의 물감을 막 넣은 참이었다. 그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주사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블링으로 표현해 둔 작품의 기본형태 위에 주사바늘로 긁듯이 그리자 아주 가는 선이 그어졌다. "주사기 선묘법이에요." 보일 듯 말 듯 가는 선을 일정한 굵기로 끊어지지 않게 표현하자면 주사기를 이용하는 게 가장 적절하겠다 싶었다.

 

 

 

 

▲ 노재환의 화실 한 쪽에 걸린 작품들은 현재 작업 중이다.

노재환은 1968년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서 태어났다. "제 꿈은 원래 만화가였어요." 노재환은 이 말을 하면서 활짝 웃었다. "저는 로봇 태권브이 세대예요. 초등학교 때 태권브이를 참 많이 그렸죠.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 잘 그렸어요." 그는 만화로 큰 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발명에 관한 주제로 전국 만화공모전이 열렸다. 그는 그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 이후 미술교사가 '그림을 그려봐라, 만화가가 돼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림을 정식으로 배웠다고 한다.

노재환은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부 선배들과 함께 진주개천예술제, 진해군항제, 서울 삼성생명 실기대회, 홍익대 실기대회 등에 다녔어요. 그렇게 다니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죠. 그림과 함께 했던 학창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즐거워요."

노재환은 학창시절에 공책에 직접 만화를 그렸다. 친구들은 그의 만화를 돌려가며 읽었다. "제가 주동을 해서 학급지도 만들었어요. 반 친구들과 함께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만화도 넣고…. 직접 손 글씨로 쓰고 등사기를 밀어서 만든 학급지였죠. 당시만 해도 청소년들을 위한 읽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학급지는 인기가 많았어요. 친구들은 그 학급지가 평생 기억할 추억거리였다고 말해요."

노재환은 글도 잘 썼다. 시를 잘 썼던 친구가 시화전에 낼 패널의 배경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직접 시를 쓰기도 했다. 지리산문학회가 주최하는 '천령문화제'에는 백일장과 미술대회에 동시에 참가했다. 백일장에서 더 큰 상을 받은 적도 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함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본격적으로 접했습니다. 전 처음에는 마네,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를 꿈꾸었지만 홍익대의 분위기는 비구상 작업이 많았지요. 예술이 무엇인지 점차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죠. 동맹휴업, 거리시위, 이한열, 박종철…. 그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것 같아요."

노재환은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다. 부산 수영공항에서 단기사병으로 복무했다. 그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다. 대학 졸업 후 국전에 입상도 했지만, 그에게 큰 상을 가장 먼저 안겨준 것은 부산일보에서 주최하는 부일미술대전이었다. 

"1996년 제6회 부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28세였어요. 그때 부산일보 1면에 기사가 나갔어요. 상금도 많았죠. 부일미술대전 대상은 저에게 '화가'라는 이름을 붙여준 큰 상이었습니다. 문학으로 치면 신춘문예 당선 같은 거죠. 부산일보 덕을 많이 봤습니다. 단체전을 할 때도 제 이름을 항상 넣어서 기사를 써주고 많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었지요. 이번에는 부산일보 자매지인 <김해뉴스>와 인터뷰를 하게 됐네요."

 

 

 

 

 

 

▲ 노재환의 작품 '유영이미지-mb015', 마블링 외에 다양한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노재환이 제6회 부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판화기법의 평면작품 '사이버 2202년'이다. 당시 부산일보는 "화성과 토성 등 우주 세계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현대 첨단 과학자들의 관심을 상상과 이미지를 통해 접근한 작품으로, 작가의 순수함과 상상력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노재환은 그 때 당선소감으로 "우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다 보면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보인다. 또 선지자나 예술가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부일미술대전 이후 여러 전국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려 나갔다. 그때부터 20년간 개인전만 16회를 열었다. 평균 1년에 한 번꼴로 전시회를 열었던 셈이다. 그가 얼마나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작업은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왔다. 고향에서 보낸 학창시절에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대학시절에는 서양화를, 대학원부터는 판화를 작업했다. 그리고 판화를 응용해 다양한 기법을 더한 작품, 현재는 마블링을 기본으로 한 작업을 하고 있다.

노재환은 10년 전 쯤 에칭기법에 콜라주를 더해 작품을 했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작품을 하면 색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마블링 기법을 도입해 화려한 색감을 더했다. 모든 색이 그에겐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물감을 종이 위에 떨어뜨린 후 종이를 움직여 기본 형태를 표현해 낸다. 열 장이 넘게 작업을 해야 원하는 것 한 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마블링 작업을 할 때는 한 번에 수십 장씩 해서 잘 나온 것만 따로 모아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노재환의 작업에는 다양한 기법이 응용된다. "마블링의 장점은 화려하다는 거죠. 단점은 즉흥적이고 가벼워보인다는 겁니다.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판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콜라주 등 미술 전반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죠." 그의 작품은 판화기법, 조형성, 재료의 이해에 모두 능통해야 만들 수 있다. 그는 "저의 마블링 작업은 단순한 즉흥이 아니라 의도된 즉흥"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기법의 시도와 세월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도록 작품을 보호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노재환은 "2~3년 단위로 작품이 조금씩 변화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진보, 발전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두고 '미완'이라고 표현했다. 계속 새로운 시도와 연구를 하고 실험해 보면서 작품을 꾸준히 할 거라고 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을 내보이고 싶다고도 했다. 30년 가까이 꾸준히 작업을 한 덕에 아직 발표하지 않는 작품들도 많다고 했다. 언젠가는 나중에 전부 다, 자신의 작품 전체를 다 보여주는 전시회를 한 번 열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노재환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이다. "비구상은 일종의 추상이죠. 새로운 길을 뚫고 가는 작업을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구도자와도 같죠. 안주하고 머무르기에는 아직 젊고, 배우고 느껴야 할 때입니다. 예술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우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명감과 희열을 느끼는 작업을 하고,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노재환의 작품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감상을 느끼게 하지만, 그의 작업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늘 '새로움'을 향하고 있었다.  

▶노재환/판화·비구상화가. 부산, 서울, 창원, 김해 등에서 1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370여 회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부산일보사, 중앙일보사, 해운대아트센터 동아대학교 등에서 작품 소장. 부일미술대전 대상,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구상전신한상 등 30여 회 수상. 부산미술대전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경남대 겸임교수 역임. 부산시립미술관 작품구입심사위원. 동아대·부산예술중학교 강사.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