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속에 엎드려 통곡하는 선비
도와준 순티에게 "내 님도 열다섯이라네"

깨치미만 먹으며 동쪽 하염없이 그려
사람들은 김 선비를 '육일거사'라 불러
선비 사후 고개 빚대 '깨치미고개' 이름

김해 한림면 퇴래리 물은이(퇴은마을)는 야트막한 산과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이었다. 앞쪽으로 높고 낮은 산봉우리가 둘러싼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들판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은 들판에 모여 습지를 이루었다. 습지에서 숨을 고른 물은 천천히 창녕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만났다. 그러나 낙동강의 수량이 많아지면 습지의 물은 그대로 농지로 흘러들어서, 물은이 사람들은 메기가 하품만 해도 홍수 걱정을 해야 했다.    
 
막바지에 이른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1456년. 그해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초여름까지 질질 끌며 비를 뿌리니, 물은이는 깊은 물웅덩이처럼 우울했다. 물꼬를 터 주고 진흙탕에 빠지는 발을 겨우 빼내서 논둑으로 올라온 물은이 소년 순티는 물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짚신을 내던졌다. 물꼬를 터 본들 소용이 없건만, 굳이 빗속으로 내몬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여름옷이래야 딱 두 벌이었다. 어제 젖은 옷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또 옷이 젖었다.
 
입은 채로 아궁이 앞에서 말려 입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려 입은 옷에서는 제가 맡아도 별로 상쾌하지 않은 냄새가 났다. 순티는 툴툴거리면서 습지의 길을 걸었다. 비가 내리는 습지의 길은 질척하고 깊어서 허벅지에 여간 힘을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침에 잡은 메기며 가물치를 삶아 뼈를 추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왔으니 지금쯤 정구지와 호박잎이 들어간 메기국이 설설 끓고 있을 것이었다. 여름이라고는 해도 한참 비를 맞고 보니 몸이 시리던 차였다. 
 
쌀은 떨어져도 물고기는 안 떨어진다는 말처럼 습지 가장자리며 논기슭 고랑에는 메기며 가물치, 미꾸라지, 붕어 같은 고기가 많았다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것들이 고랑을 타고 올라와서 소쿠리를 던지기만 하면 금방 함지를 채웠다. 어른들은 농사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순티와 동무들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물고기 잡아 끓여 먹는 게 좋았다. 어차피 평생 농삿일을 하며 살아갈 처지이지만, 아직은 채 여물지 않은 열다섯 살이었던 것이다.   
 
바삐 걸음을 놓던 순티의 몸이 어느 순간 휙 구부러졌다. 얼른 몸을 바로잡고 보니 발부리에 뭐가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나 살피니 괴나리봇짐과 갓이 나뒹굴어져 있고, 도포를 입은 선비가 길에 엎드려 있었다. 선비의 상투는 다 풀어져 있었고, 도포며 바지저고리는 흙탕물이 튀어 제 색깔은 흔적도 없었다. 어디 먼데서 한참 걸어온 게 분명해 보였다. 쯧쯧 혀를 차면서 선비의 봇짐과 갓을 주워들고 다가가던 순티는 마침 고개를 드는 선비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다.
 
쏟아지는 빗속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김계금(金係錦) 선비였다. 김선비는 한 오리 떨어진 장원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일찍부터 벼슬을 하는 바람에 주욱 한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장방에 있는 노루목(장항산)에 묘를 쓰고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물은이에 집을 마련했다. 물은이에서 노루목까지 근 십 리나 되는 길을 삼 년 동안 오가며 시묘살이를 한 김선비는 다시 한양으로 갔는데, 봄 가을이면 성묘를 오곤 했다.
 
김선비와 함께 물은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또 한 사람은 김한림이었다. 물은이에서 태어난 김계희(金係熙)는 과거에 급제해 한림(翰林·예문관에서 사초 꾸미는 일을 하던 정9품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부모가 병이 들자 그 좋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지극히 봉양하고 다시 벼슬을 하러 올라갔다고 했다.  
 
순티도 물은이 다른 아이들처럼 김선비 김한림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런만치 김선비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반 억지로 김 선비를 업고 김선비 집으로 갔다. 비어 있던 집 마당에는 풀이 돋아 있었고, 몇 년째 그대로인 지붕은 방금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로웠다. 순티는 동무들에게 가서 메기국 한 사발과 밥을 가져와서 개다리 소반에 상을 차렸다. 그리고 긴 장마에 눅눅해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김선비는 순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지만 메기국이며 밥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튿날 비가 그치더니,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김선비 소문이 돌아다녔다. 소문은 여러 가지였다. 왕실의 숙부 되는 이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임금이 된 지 삼 년째인데, 거기에 승복하지 못하는 신하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했다. 쫓겨난 어린 임금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고, 사지가 찢겨 죽은 사람이 여섯이라 했다. 김선비는 그 때문에 벼슬을 내던지고 물은이로 온 것이라 했다. 왕은 하늘이 내는 것이라 했는데 그 때문에 싸움이 나고 여럿이 죽었다니, 그럼 왕은 하늘이 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순티는 혼란스러웠다.  
 

▲ 그림=범지 박정식

며칠 뒤 뒷산으로 꼴을 베러 갔다가 순티는 김선비가 하염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김선비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게를 내렸는데, 인기척을 느낀 김선비가 돌아보았다. 순티는 모른 척 꼴을 베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선비가 다가와 순티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순티는 놀라서 낫을 집어던지고 풀밭에 엎드렸다. 양반에게서 공손한 인사를 받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일어나게. 그때는 정말 고마웠네."
 
김선비가 순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이를 물었다. 순티는 수줍어하면서 열다섯이라고 대답했다.
"열다섯이라…."
 
김선비는 뭔가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내 날마다 그리는 동쪽의 님도 이제 열다섯이시라네. 그대를 보니 더욱 애틋하구먼."
 
여름이 지나자 한양에서 김선비 식구들이 내려왔다. 김선비는 직접 농사를 짓고 재실을 빌어 아이 서넛을 맡아 가르치며 살았다. 그러면서 틈틈이 정자를 지었고, 매일 뒷산에 올라가 어린 임금이 있다는 동쪽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뒷산에서 순티를 만난 김선비가 말했다.
 
"이 산은 이제 오서산(吾西山)이라 불러야겠네. 임금은 멀리 동쪽에 있고 나는 여기 서쪽에 있으니 말이지."
 
순티는 김선비의 말을 물은이에 전했다. 뒷산의 이름은 그때부터 오서산이 되었다. 오서산에는 깨치미(고비)가 많았다. 사람들은 깨치미를 뜯어 검소하게 먹고 살면서 날마다 어린 임금이 있는 동쪽을 쳐다보는 김선비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 불렀다. 어린 임금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다 사지가 찢겨 처참하게 죽은 여섯 명의 신하가 있어서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살아 있으면서 새 임금이 주는 벼슬을 받지 않고 어린 임금을 마음속으로 섬기는 또다른 여섯 명의 신하를 생육신(生六臣)이라 하는데, 김선비는 생육신에 더해도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순티는 깨치미를 주로 먹고 사는 김선비를 깨치미 선비라 불렀다. 깨치미 선비는 정말 깨치미를 좋아했다. 허구헌날 먹는 반찬이 깨치미였다. 순티가 보기에 고사리와 달리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얀 털을 뒤집어쓰고 올라오는 깨치미처럼 깨치미 선비도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오서산 기슭에서 동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정자가 완성되어 서강정(西岡亭)이란 현판을 달자, 육일거사 깨치미 선비는 서강선생이 되었다.
 
어느 날 순티는 장가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서강정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닫힌 정자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서강선생이 동쪽을 향해 머리를 풀고 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순티는 통곡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정자 밖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 울음을 그친 서강선생은 순티를 보더니 다시 엎드려 통곡했다.
 
순티는 하는 수 없이 장가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순티는 동쪽에 있던 서강선생의 어린 임금이 목 졸려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서늘했다. 순티와 나이가 같다 했으니 어린 임금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순티는 그날 서강선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서강선생이 글을 배우지 않겠느냐 물었을 때도 순티는 그날 서강선생의 모습이 떠올라서 머리를 흔들었다.
 
효동마을 처자에게 장가를 든 순티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농삿일이라면 서강선생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고, 서강선생을 도울 수도 있었다. 김해부 유향소(留鄕所·군현 단위로 조직되어 있던 지방자치기구)의 향정(鄕正·유향소의 우두머리)으로 명실공히 존경받는 서강선생이었지만 농사에 있어서만은 순티를 따를 수 없었다.    
 
서강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순티는 상여를 메고 진영 신룡리 장지(葬地)로 갔다. 서강선생과 함께 산 수십년의 세월이 아득하고 또 멀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장지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빴다. 상여가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지날 때 순티는 무심히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큰나무가 없으되 발밑이 질척한 걸 보니 분명히 물이 가깝고, 물이 가까우니 깨치미가 잘 자랄 곳인데 어째 하나도 안 보일까 하고.
 
순티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었던 것일까. 이듬해 서강선생의 무덤으로 가는 고개에는 깨치미가 무덕 무덕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어린 임금을 오래 생각하며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듯이 깨치미로 검소하게 산 서강선생의 넋이 깨치미로 솟은 것이라 하고, 그 고개를 깨치미고개, 궐현(蕨峴)이라 불렀다. 그러나 더러 서강선생이 생각날 때마다 혼자 무덤을 찾곤 하던 순티의 생각은 달랐다. 순티는 서강선생이 오서산 깨치미를 혼자 다 캐먹어 버려서 순티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 좋은 깨치미를 맘껏 맛보지 못하게 한 것이 미안해서 죽어 깨치미로 솟은 것이라 여겼다.
 
서강 김계금은 세종 때 이천, 장영실 등과 함께 앙부일구, 갑인자 등을 제조하는 데 관여하고 예조판서까지 지낸 김돈(金墩)의 아들이다. 김계금의 출사는 비교적 늦은 편으로, 40세에 생원이 되고 49세에 증광시(增廣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되던 임시과거) 문과를 통과해 사헌부 지평(持平)과 의성현령을 지냈다. 51세 되던 1455년(세조1년)에 권지학유(權知學諭·성균관에서 유생 교육을 담당하던 임시직 교수 중 하나)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육신 사건으로 많은 인물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463년(세조9년) 겸지평으로 호패의 규검(糾檢)을 위해 지방을 순행한 일 외에는 일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김계금이 낙향해 여든 여덟까지 살았던 물은이는 동서남북으로 들판을 둘러싸고 내려다보는 일곱 개의 일자봉, 감투봉 아래 누워 있는 여인의 가슴과 배에 해당하는 지점이어서, 대대손손 큰 인물이 날 한반도의 이름난 명당의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물은이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가 천년을 넘게 대를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고, 화포습지의 발원지이다. 그러나 국도에서 비껴선 이 한적한 마을도 지금은 공장이 다 점령해 버린 상태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