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라는 자의식이 싹틈과 동시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가게 된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 지루한 질문의 과정 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로마에 유학 갔을 당시 필자를 엄습한 IMF구제금융 사태였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비와 학비를 조달하던 가난한 유학생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했던 그 국가적 위기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음악원에 가는 시간 이외에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연습을 하거나 숙제를 했다. 그러다가 질리면 IMF 여파로 급거 귀국을 해버린 한 한국인 유학생이 남겨주고 간 책들을 읽었다.
 
그때 곁을 지켜준 한 권의 책이 바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다. 사실 <데미안>은 고등학교 때 별 생각 없이 한두 번 쓱 훑어보다가 만 적이 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외부환경의 변화 때문에 밖으로 향한 사고보다는 내부로 침탈해오는 생각에 더욱 노출돼 있던 30대 초엽에 다시 찾아온 <데미안>은 인생의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투쟁한다. 태어나려고하는 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이 문구는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청년들을 열광시켰다. 마찬가지로 <데미안>은 1998년 당시 곤경에 빠져 있던 내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귀국 이후에는 많은 책들을 접할 여유와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매일의 바쁜 삶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알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고, '부리'는 연약해져 가고 있음을 절감하는 하루하루가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휙'하고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또 언제쯤 두 번째 <데미안>을 만나게 될까.

김해뉴스

≫박지운/김해시립합창단 지휘자. 서울 베아오페라예술대학 오페라과 주임교수. 이탈리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 작곡, 합창지휘의 3가지 과정 디플롬 획득. 2006년 귀국한 뒤 지휘자, 작곡가 활동 병행. 2011년 창작오페라 '선덕여왕' 작곡 및 초연 지휘. 2014년 창작오페라 '포은 정몽주' 작곡 및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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