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미술인에게서 '소를 키우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연락을 했더니 그림을 그릴 작업실을 짓고 있는 중이니 인터뷰를 조금 늦추자고 했다. 얼마 전에는 한 연극인에게서 '무대세트를 만들어 준 실력 뛰어난 화가'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취재수첩에 적어두었다. 그리고 이번호 '공간&'에 '2015 뉴페이스인김해전 선정작가'인 김도형 화가를 초대할 계획을 세웠다. 화가에게 연락을 하고서야 알았다. '그들'은 한 사람이었다.
한림면 수조마을에서 소를 키우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도형(44)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
나만의 색이고 남들이 쓰지 않으니까
다른 색과 잘 어울리고 꿈·환상 떠올라

고흐 '해바라기' 독특·강렬함에 반해
고교 때부터 미술 세계에 푹 빠져
고향마을에서 소 키우며 그림 작업
그림은 운명 … 힘 있을 때 그려둬야죠


김도형 화가의 작업실은 한림면 용덕리 771-3에 있다. 수조마을 입구, 고속도로 교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는 곳에 보라색 지붕의 이층 건물이 있다. 김도형의 작품은 짙고 옅은 보라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래서 보라색 지붕을 보자마자 '저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보관장소 위에서 내려다 본 작업실의 모습. 김도형이 위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다.

건물 1층은 큰 창고이다. 김도형의 친구인 도예가가 사용한다. 철제 계단 29개를 올라서면 작업실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그 문을 열자 거짓말 조금 보태서 운동장만한 작업실이 나타났다. 대형캔버스 작업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업실은 70평 정도쯤 된다. 층고도 높다. 바닥에서 가장 높은 지점의 높이가 4m이다. 입구문과 가까운 쪽에는 바 형태의 주방이 있다. 그 옆으로 조금 여유를 두고 수장고가 있다. 완성된 작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수장고 맞은편, 그러니까 작업실의 가장 안쪽에는 작은 집(?)이 있다. 벽면이 모두 책꽂이로 만들어진 집이다. 1층은 현재 작업 중이거나 물감이 다 마르기를 기다리는 작품을 넣었다 뺐다 하는 보관공간이다. 보관장소에서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화가가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있다. 휴식공간에서는 작업실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업실 한쪽 벽은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도록 유리로 마감했다. 그 앞에 소파가 몇 개 놓여졌다. 작은 집 같은 보관장소와 수장고 사이에 화가의 이젤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중요한 것을 공간의 네 귀퉁이에 배치했고, 한가운데는 텅 비워 두었다. 이 작업실의 천장 내부는 연한 보라색이다. 화가가 직접 페인트를 배합해 색을 만들었고, 칠했다. 네 바퀴로 움직이는 대형 철골 구조물을 타고 말이다. 이 철골 구조물은 그림을 그릴 때도 사용한다. 소파 앞의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베란다가 있다. 공사 중만 아니라면, 마을에 공장만 들어서 있지 않다면, 경치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 건물 옆에는 화가가 키우는 소 170마리를 위한 축사가 있다. 몇 년 전 김해축협에서 사보 <산들에>에 '축산인 김도형'을 싣기 위해 취재를 하러 오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가 보다 하고 왔다가 놀랐다는데, 이번에는 기자가 놀랐다.

김도형은 1971년 한림면 용덕리 수조마을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조마을에 살고 있는 김씨 성의 화가라! 짚이는 게 있어 구한말 당대의 명필로 꼽혔던 아석 김종대(1873~1949)와의 관계를 물었다. 김도형은 아석의 3대손으로, 아석이 재종조부가 된다.

"수조마을은 집안 일가가 모여 살았던 집성촌이에요. 어려서부터 큰아버지한테서 아석 선생의 후손이라는 걸 듣고 자랐지요. 강학장소였던 거연정도 잘 압니다. 지금은 집안어른들도 돌아가시고, 남은 일가들도 타지에 나가고, 마을에는 집안사람이 몇 안 남았습니다. 마을입구 쪽은 공장이 들어와 옛 모습을 보기 힘들죠.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데 공장이 너무 많아져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김도형이 윗대 어른들과 마을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김도형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았습니다. 그 독특한 터치와 강렬한 이미지에 반했어요. 그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지요. 당시만 해도 김해에는 미술학원이 없었어요. 부산 서면에 미술학원을 알아보러 갔다가 중앙미술학원을 찾았습니다. 무작정 들어가서 원장님과 이야기를 했지요. 저를 좋게 보셨는지 학원비도 깎아주시더군요. 그 다음 주부터 토요일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학원에 가서 밤새도록, 또 일요일 낮까지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입시미술학원이라 밤새 그림을 그리는 형들이 있었어요. 형님들께 많이 배웠지요."

▲ 대형작업을 염두에 두고 지은 김도형의 작업실.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를 하기를 바랐지만, "네가 선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다"며 결국 아들의 뜻을 존중해주셨단다. 그러나 그는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직장생활을 잠시 하다가 군대를 다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림을 향한 그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제대 후에는 부원동에서 작은 화방을 운영했다. 직장동료의 친구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농협에 다니고 있는 아내는 지금까지 화가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이다.

"아내 도움으로 28세 때 뒤늦게 창신대 미술학과에 입학했어요. 저는 스승을 잘 만났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장진만 교수님을 만났지요. 색과 선이 좋은,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교수님은 저를 잘 챙겨주셨고, 저는 교수님을 잘 따랐습니다. '많이 다니면서 좋은 색깔을 많이 봐야 한다, 스케치를 많이 해봐야 한다'며 여행도 자주 다니셨어요. 전라도와 경상남도, 동해안 등지에 함께 여행도 다녔습니다. 교수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미술인생 최초의 스승이셨고, 현재의 김도형을 만든 스승이십니다." 그는 장진만 교수가 생전에 남긴 드로잉집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였어요. IMF 때문에 화방이 세 들어 있던 건물 주인이 부도가 났어요. 권리금은커녕 보증금도 못 받고 화방을 접고 말았지요. 그래서 32세 때 수조마을에 있던 아버지의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축산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축산을 하셨기 때문에 일을 많이 도와드리면서 자랐거든요. 소를 키우면서 비로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소를 키워서 물감을 샀지요."

새벽부터 두 시간과 해질녘 두 시간 사료를 주는 중요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 그리다가 소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는 그림도 축사관리도 빈틈없이 하기 위해 축사 옆에 작업실을 지었다. "개인전보다 공모전에 출품을 많이 했어요. 공부하는 과정이거든요. 큰 작업을 할 수 있고, 평가· 비판·심사도 받고, 나의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고, 다른 작가의 작품도 보고, 미술계의 흐름도 알 수 있지요."

그에게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만의 색, 남들이 쓰지 않은 색을 찾았어요. 그것이 나에게는 보라색이었지요. 꿈, 환상을 떠올려 줍니다. 보라색의 매력은 다른 색과 잘 어울린다는 겁니다. 색을 잘 잡아 주지요." 그의 작품은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작품 속의 사람 옷이나 작은 파라솔, 지붕, 간판 같은 부분에 강렬한 원색을 아주 조금 터치한다. 그 작은 부문이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보라색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신항섭 미술평론가는 김도형의 작품세계를 '보라색으로 꾸며지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그는 "(김도형의) 200~500호에 달하는 대작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압박감은 또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마치 그림 속의 풍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구체적인 공간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대작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비현실적인 설정인데도 실제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듯싶은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소품에서 맛볼 수 없는 공간적인 크기 및 깊이 때문"이라고 평했다. 김도형의 풍경화는 필요 없는 인위적 부분을 모두 빼고 그린다. 뼈대만 남아있는 땅의 원래모습을 그려내는 듯하다. 그가 그린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다.

김도형의 작품 중에 '부원동 새벽시장'이 있다. 가로 480㎝ 세로 156㎝의 대작이다. "2014년에 윤슬미술관의 2015년 뉴페이스전 작가로 선정됐을 때 무척 기뻤죠. 그 소식 뒤에 부원동 새벽시장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김해에서 아주 중요한 풍경이었고, 제가 어릴 때 늘 오가던 버스터미널 자리이기도 했죠.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려야 했습니다. 그 새벽의 이미지를 보라색으로 느낌을 잡아서 그렸지요." 부원동 새벽시장은 그렇게 김해의 화가 김도형의 대형 캔버스에 영원히 남았다.

그의 보라색은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인전을 할 때였어요. 사람들이 절 보고 '저기 보라돌이 작가가 온다'고 말하더군요." 활짝 웃는 그를 보니 입고 있는 티셔츠도 보라색이다. 그는 8월에 한솔재활요양병원의 한솔마음갤러리 전시를 앞두고 있다. 3년 후에는 서울에서 전시를 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당분간은 큰 그림만 그릴 겁니다. 5미터, 6미터 크기의 작품을요. 큰 작품은 그릴 힘이 있을 때 그려야죠.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를 열 돈도 모아야 해요. 아이들 공부를 마칠 때까지, 앞으로 10년간 축산을 더 할 겁니다.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그림만 그릴 겁니다."

그는 그림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림은 나의 애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그림이 팔릴 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 사람한테 가서도 사랑받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죠." 

≫김도형
대한미술대전·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술협회·김해미술협회·서울미술협회·경남구상작가 회원.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외 수상 다수.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외 개인전 8회. 서울국제아트페어 외 아트페어부스전 다수. 경남미술품경매전 외 초대·단체전 160회. 경남구상작가회전 외 그룹전 다수.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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