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발발 다음달 전장 투입
2개월만에 사망 … 시신·유품도 못 찾아
김해생명과학고 기념비에서 명단 확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빠를 평생 그리워했습니다.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오빠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오빠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었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김해뉴스> 제228호 신문이 발행된 지난달 24일 오후 5시께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3면 기사에 나온 학도의용병 박경권이 우리 오빠예요." 전화 속 여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세월의 애환, 설움, 감격이 한데 섞인 떨림이 휴대전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했다 목숨을 잃은 고 박경권 씨의 여동생 박득순 씨가 김해생명과학고의 학도의용병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오빠 이름을 만져보고 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고 박경권 씨의 여동생 박득순(62) 씨였다. 그는 "전화를 끊은 후에도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기사를 다시 천천히 읽고, 또 다시 읽어 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기사를 본 뒤 오빠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아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김해에 오빠의 흔적이 남아 있고, 오빠의 친구들이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다음날 박 씨는 김해 학도의용병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옛 김해농업중학교·김해농업고등학교)를 찾았다. 마침 이날은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꽃다발도 잊지 않았다. 박 씨는 한참이나 기념비를 바라보고는 기념비 아래에 꽃다발을 가만히 내려 놓았다. 그는 학도의용병 명단이 새겨진 기념비 뒤편으로 향했다. 전사자 명단 중 '박경권'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오빠의 이름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박 씨는 오빠 이야기를 조금씩 끄집어 냈다. 박경권 씨는 1950년 7월 당시 19세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규훈·박희양 씨 등 김해농업중학교 친구들의 회상에 따르면, 학급 급장이었던 박경권 씨는 공부를 잘 했고 성품이 뛰어났다. 집안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전 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했다. 가족들은 1950년 9월 시신은 물론 유품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박득순 씨는 휴전이 되던 해인 1953년에 태어났다. 태어나기 2년 전에 오빠가 사망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오빠를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빠의 부재는 박 씨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온 가족은 박경권 씨를 잃은 슬픔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박 씨는 어릴 때부터 오빠의 죽음을 체감하며 자랐다고 한다.

"김해농업중학교에 다녔던 오빠는 어릴 때부터 정말 똑똑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그런 장남에게 모든 기대를 거셨던 것 같아요. 오빠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아버지는 자신도 따라 죽겠다고 했답니다. 그 뒤 가족들은 한 번도 오빠를 잊은 적이 없었어요. 제 기억 속에는 늘 오빠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박 씨의 어머니는 장남을 잃은 후 병을 앓았다. 귀한 첫 아들을 잃고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어 술과 담배를 입에 댔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답답함을 지울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 도움이 안 됐던지 어머니는 늘 울면서 오빠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박 씨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슬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무너지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항상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끼던 회중시계를 항상 한 손에 쥐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아버지가 군청에 갔던 길에 오빠 친구인 이규훈 씨를 만났다며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오셨더라고요. 굳건해 보이던 아버지는 오빠 친구들을 우연히 만날 때마다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한 번은 정부에서 유공자 연금 통지서를 보냈다. 아버지는 아들 생명 값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아들을 그리워했다.

박 씨는 오빠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바라보며 감사와 아쉬움의 뜻을 나타냈다. 그는 "그동안 오빠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학도의용병 전사자 중에서 이름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 기념비와 오빠의 이름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오빠에게 정말 미안하다. 또 이렇게 기록하고 남겨준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김해뉴스>의 주선으로 오빠의 친한 친구였던 이규훈 씨와 연락을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오래 전에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 전화기를 사이에 놓고 울먹였다. 이들은 곧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박 씨는 "꼭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오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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