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문양을 제 작품에 담고 싶습니다."
도예가 김정태(49) 씨는 수로왕릉 영정각에 보관 전시돼 있는 허왕후의 표준영정에서 본 문양을 자신의 도자기에 새기고 있다.
그는 허왕후의 도포자락에서 희미한 둥근 원 모양의 문양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그 문양에서 가야의 문양을 찾아낸 것이다. 김정태 씨의 호제방을 찾아가보았다.

▲ 시골집에 자리한 호제방으로 들어가는 나무대문이 정겹다.
청음도예 운영 친구가 남긴 흙과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흙 섞어 특화
허왕후 도포자락 원 문양 작품 접목
삼강기법 표현 조만간 상표등록 예정

도자기의 매력은 사람을 만드는 데 있어
수양과도 같은 배움의 길 계속 갈 것


호제방은 진례면 초전리 361에 있다. 시골집을 작업장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성형을 마친 후 말리고 있는 접시가 놓인 작업대가 손님을 먼저 맞았다. 작업장에는 현재 작업 중인 그릇들이 즐비했다. 작업장 옆에 있는 작은 집은 전시실 겸 응접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시실 문을 여니 찻잔과 주전자, 작은 그릇, 화병 등이 빼곡하게 채워진 장식장이 보였다. 오른쪽 방에는 낮은 차탁이 있고, 벽면의 진열대에도 작품이 가득했다.

김정태는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를 특별히 잘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못하지도 않았어요. 만들기를 꽤 좋아했죠. 미술시간에는 재미있어 하며 비누조각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부산공예고등학교(현 한국조형예술고) 9기로 입학했다. 그는 사실 자신이 원하던 고등학교에 못 갔다. 그래서 공예고에 갔다. 1지망이 사진인쇄과였고, 2지망이 도자과였다. 그는 도자과로 입학했다. 입학 후 처음에는 데생, 소묘, 동양화 등을 배웠다. 도자과는 1학년 때 코일링 작업, 손물레 등으로 만들기를 배운다고 한다. 그는 도예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특별히 하지는 않았다. 방과 후 실습실에서 가서 연습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제는 열심히 수행했다. 도예가가 되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한 친구 몇은 방과 후에도 남아서 선배들과 도자기를 만들곤 했다. "선배들이 좀 무섭다는 소문도 들리고 해서 전 안 갔지요. 허허허!" 그는 고등학교 시절의 그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예고 축제가 '예얼제'입니다. 이 축제기간 동안에 학생들이 만든 도자기를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합니다. 그런데 1학년은 두 명만 작품을 냅니다. 그 중에 한 명으로 제가 뽑혔어요. 기분이 좋았죠. 그때 '나에게 소질이 있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가 3학년 때 전기로 돌리는 발물레가 학교에 60대 정도 들어왔다. "저는 물레작업을 완벽하게 배우지 못했어요. 물레보다는 핀칭 작업, 석고틀 작업 등 손으로 하는 것을 더 잘했어요. 3학년 때부터는 도자기를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실습, 실기 점수가 안 나오면 등수가 떨어지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동안 흙과 친해졌습니다."

▲ 도예가 김정태 씨가 호제방 작업장에서 성형을 마친 접시 위에 화장토를 바르고 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의 마음을 잡아준 사람은 회화과의 박동만 교사였다. 그는 화가였다. 김정태에게 배 형상을 한 수반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잘 만들고 싶었고, 결과도 좋았다. 예얼전 축제가 열렸을 때 4개를 만들어냈는데 다 팔렸다고 한다.  학교 축제에 온 학부모들과 내빈이 도자기를 사는데, 누가 사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작품이 팔렸다고 한다. 그것이 김정태가 처음으로 판 작품이었다.

김정태는 1984년 10월 친구 5명과 함께 경기도 부천의 요업회사에 취업했다. 경기도에는 도자기 공장이 많았다. "다음해 여름까지 약 10개월 정도 그 회사에서 일했어요. 직원의 친척집에서 5명이 자취를 했어요.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로 식사당번을 정해 밥도 해먹고, 밥 해 먹기 귀찮을 때는 회사 선배가 술 먹자고 불러주길 기다리기도 하구요. 첫 달 월급을 받기 전에 가지고 간 비상금을 다 써버려서 외상 쌀을 받아오기도 했죠. 초코파이에 양초를 꽂아서 생일파티도 했어요. 19, 20세 그 무렵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얼음이 서걱대던 포천막걸리는 아직도 생각나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시절은 한동안 계속 됐다.

그는 부천에서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함께 양산의 요업회사에 다녔다. 학교 교사 소개로 진해의 요업회사에 취업도 했다. 그런데 친구가 한 두 명씩 입대를 했고, 그도 마지막으로 1988년 단기사병으로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니 회사에서 다시 복귀하라고 연락이 왔다. 재입사한 그는 개발실에서 근무했다. 디자인 쪽 일이라 흙과는 좀 멀어졌다. 회사가 다른 분야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필리핀에 공장을 차렸다. 그는 1992년 필리핀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다가 1995년 귀국했다. 그 후 퇴사한 뒤 1996년 부산 괴정동에 도자기 개인공방을 차렸다.

공방을 차리긴 했으나, 친구들이 급하다고 하면 달려가서 도와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기, 타일 깔기, 실내인테리어 등 어지간한 일은 다 할 줄 안다. "남들이 보기에 솜씨가 모자라 보일지라도, 제가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직접 만들어 씁니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김해분청도자관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사다리 위에 올라가 전시조명을 설치하던 사람이 있었다. 전기 기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침없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전시실의 조명을 손보던 그 사람이 바로 김정태였다.

"솔직하게 말해 학교에 다닐 때는 도예가를 할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앞에는 항상 도예가로 가는 길만 있었고, 저는 자연스럽게 그 길로 걸어왔어요. 고등학교 진학 때에도, 전공을 정할 때도, 회사생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필리핀에서 돌아왔을 때 도자기가 내 길이구나, 도자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늘 도자기로 가는 길로 걸어온 거지요."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는 서서히 진정한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진례에 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를 동문들에게서 들었어요. 분청도자기 축제 때는 가서 구경도 했구요. 혼자 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2003년에 지내동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도자기 축제기간동안 지내동에서 진례까지 오가는 게 힘들더라구요. 진례로 옮기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이 집이 나왔어요, 2006년에 현재의 자리로 왔습니다."

▲ 가야인물기마상 문양으로 장식한 백자 다기세트. 백자의 흰색과 문양의 코발트색이 잘 어울린다.

김정태는 도자기 공부가 끝이 없다는 생각을 했고, 동부산대학 생활도예과 1기로 입학했다. "젊은 도예인을 잘 길러주는 학교입니다. 학교에서 젊은 애들과 부딪혀보면서 새로운 것도 알게 되었고, 도예이론을 보충했고, 현장실사와 견학도 다녔고, 견문도 넓혔고, 좋은 교수님들도 만났고, 도자기하는 사람들도 만났고. 하여튼 좋았죠. 졸업을 했지만, 공부는 끝이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그는 자기만의 흙이 있어야 자기만의 색깔이 나는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림에서 청음도예를 하던 친구가 있었지요. 아깝게도 지금은 세상을 떠났는데, 친구가 남겨준 좋은 흙과 제가 가지고 있던 흙을 섞어서 특별한 흙을 만들어냈습니다. 좋은 흙을 찾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리고 허왕후의 옷에서 찾은 문양을 작품에 접목했지요. 좋은 흙과 가야문양의 만남이 이루어지자 '김정태의 그릇'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주위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이 문양을 가야문양으로 상표등록할 생각이에요." 가야문양은 삼강기법으로 표현한다. 검은색이나 회색의 느낌이 나는 어두운 색감의 작품에는 흰색으로, 흰 백자에는 코발트 색을 사용한다. 

그는 "도자기의 매력은 그릇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흙을 만져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일종의 수양입니다.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잡념이 없어집니다. 제가 도자기를 만들면서 느낀 건 먼저 사람이 되어야 작업이 되더라, 급하게 할 일이 아니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급하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러면 불량이 나요. 허허허.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숙련된 노하우가 전부가 아닌, 절대로 작업을 속일 수는 없는, 정직한 작업이지요." 

≫김정태/김해도예협회 사무국장, 경남공예조합 회원, 동부산도예가회 회원. 김해도예협회 회원전, 동부산도예가회원전 등 전시회 다수. 김해시공예품경진대회·경남공예품대전 장려상, 경남공예품대전 특선, 대한민국공예품대전·김해시공예품대전·김해시관광기념품공모전·김해분청도자공모전·대한민국도예공모전 입선 등 수상 다수.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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