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홍 두령과 산채 사람들 붙잡혀
참수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에
민초들의 어려움 살펴줄 것 상소로 호소

매화로 상징되는 사대부 세계 시로 호통
어 선비 시세계, 홍길동전으로 형상화돼

어무적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백성들의 궁핍하고 처참한 생활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토로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시뿐이었다. 어무적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사람살이의 곤란함에 대해 거침없이 썼다. 어무적의 시는 폭정을 근심하는, 양심적인 선비들을 통해 조용히 알려졌다. 서얼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난 조신과 함께 통신사 신숙주를 따라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고, 중국의 유명한 문집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文名)이 높아져도 어무적의 가슴은 황량했다. 적자인 재종형 어세겸이 스물두 살에 생원이 된 이래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장악원 소속 미관말직 율려습독관을 겨우 지낸 어무적의 신세는 처량했다. 어세겸이 상서로운 봉황이라면 서얼인 어무적은 좁은 연못 속에 갇힌 가난한 물고기 신세였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내고 나자, 홍두령이 청년에게 밥상을 들려서 찾아왔다. 보리밥과 짠지로 차려진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산채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마련했을지를 생각하니 어무적은 선뜻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드시지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어제 저녁도 사양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이 뼈아픈 밥을 잊지나 말아 주시오."
 
홍두령의 간곡한 말에 어무적은 수저를 들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을 정성들여 다 먹고 나자 홍두령은 청년을 따라가라고 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쉬운 작별을 고하는 홍두령에게 어무적은 말했다.
 
"그대와 나의 뜻이 다르지 않으나 행(行)이 다르니 염려스럽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청년은 박달나무 사이로 난 험준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무적은 청년에게 언제 산에 들어왔는지 물었다. 청년에게서 벌써 나이가 차 혼인을 한 아들 석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벌써 삼 년째가 된다면서 말을 아끼는 태도도 조신하고 무게가 있는 석과 닮았다. 부모는 어떻게 되었으며 살던 곳은 어디였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청년은 더 이상 말을 붙일 곁을 주지 않았다.
 
한 시진을 걸은 뒤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나무 아래 앉은 청년이 어무적에게 물었다.
 
"산채에 자주 오셔서 글선생이 되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들은 많은데 글선생이 없습니다."
 
청년의 말은 공손하고 진실했다. 어무적은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이란 과거를 보아 벼슬을 하는데 쓰이는 것인데, 나라와 척을 지고 살면서 글은 배워 무엇에 쓰려는고?"
 
청년이 흐트러짐 없는 투로 말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면 되지요. 두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조참판을 아비로 두었으나 아비라 부르지 못했고, 어여쁜 아우를 두었으나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었답니다. 하도 분하여 형이라는 사람에게 대들었다가 물볼기를 맞고 쫓겨났다지요. 두령께서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임금 아닌 임금을 중심으로 어와어와 태평가를 부르는 나라를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글을 배워두지 않으면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림=박점숙 화가
어무적은 어안이 벙벙했다. 청년이 말하는 나라는 어무적이 쓴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노래'라는 시에서 밝힌 바로 그런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광포한 왕과 탐관모리배의 등쌀에 골병이 든 백성들이 죽어서나 꿈꿀 수 있는 나라가 그런 나라였다. 자기처럼 불우하게 살아가야 할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무적도 당연히 그런 나라가 만들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꿈은 꿈이요, 현실은 현실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꿈을 꾸기만 한다면 결국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었다.
 
"누군들 꿈꾸지 않았겠나. 칼이 아니라 붓을 잡은 탓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꿈을 꾸었다네. 내가 글로써 꾼 꿈이 그대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구먼. 약한 자의 붓은 힘이 없어 자칫하면 신세한탄이요, 또 자칫하면 제 몸을 베는 비수가 되지. 자네도 속절없는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저는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앞의 임금 시절에 아버지는 임금의 편을 들었는데, 지금 임금이 그 일을 나쁘다 하여 죄를 주었지요. 아버지는 유배길에 사약을 받았고, 저는 관노로 끌려가다 도망쳤습니다. 저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임금이 싫습니다."
 
그래놓고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꼭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뭐라고 더 말을 붙이려 했으나 청년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 시진을 더 걸은 뒤 박달나무 사이로 난 숲길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오르막인데, 길을 따라 반 시진 더 가십시오. 그러면 새재 본길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채가 있는 곳은 꽃밭서덜이라 합니다. 사람 일이란 혹 모른다면서 두령님께서 일러드리라 하셨습니다."
 
청년은 깎듯이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렸다.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어물쩍대는 사이에 박달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무적은 하릴없이 청년의 뒷모습을 쫓다가 걸음을 옮겼다.
 
영운마을로 돌아온 어무적은 사흘 내리 잠을 잤다. 실컷 자고 일어나자 오랜 여행에 지친 몸이 가뿐해졌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을 보고 눈물 짓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어무적은 당분간 집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이듬해 여름, 어무적에게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문경새재에서 홍길동이란 도적이 붙잡혔다는 것이었다. 한양에 다녀온 종친의 말에 의하면 도적의 무리가 수백이 넘었는데, 일부는 싸우다 잡히고 일부는 달아났다고 했다. 
 
"잡고 보니 도적이 아니라 의적이었다고 하더군. 산채에 귀틀집이 수두룩하고 어린아이며 부녀자에 노인까지 딸린 인구가 수백이더란다. 항간에서 수군대기를 탐관오리 재물을 털어 굶주린 백성과 유민에게 나눠준 의적이라고 하지만, 나라에서야 어디 그런가. 도적이요, 반역의 무리지."
 
산채의 두령은 참수당하고, 도적의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말을 듣고 어무적은 가슴이 서늘했다. 그때 간곡하게 일러 자수하게 하였더라면 목숨을 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반듯하고 곱던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무적은 이 풍진 세상을 힘들게 살다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어무적은 상소에서 자신이 천출서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보니 마당에서 지붕 새는 것이 잘 보이듯 높은 곳에 있는 임금과 관리들의 잘못이 잘 보인다 하고, 임금이 덕을 기르도록 충언했다. 또 언로를 열어 기개있는 선비를 옹호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줄 것을 호소했다.
 
어무적이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김해부사는 노발대발했다.
 
"저를 생각하여 벼슬까지 주었는데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못된 벼슬아치라 썼다면서? 정말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닌가."
 
김해부사는 어무적을 잡아다가 혼을 내려 했으나, 워낙에 이름을 떨치는 자라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렸다. 어무적은 상소의 답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소에 대해서는 좋든 싫든 비답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상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벌이라도 내려와야 정상이었다. 상소를 읽고도 답이 없는 임금이라니, 어무적은 절망하고 말았다.
 
어무적은 술로 시름을 달래며 겨울을 났다. 그러다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집을 나섰다. 매화가 만발해 아름다운 향기를 흩날리는 이른 봄날이었다. 영운마을 뒤쪽 활뿌리에서 시작된 신어천을 따라 걷던 어무적은 밭두렁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농부는 몇 십년은 족히 자랐음직한 매화나무를 찍고 있었다. 도끼질에 향기로운 매화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이고 있었다. 어무적은 의아하여 농부에게 어찌하여 한창 꽃이 좋은 매화를 찍어내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매화 때문에 작년에 당한 일을 생각하면 향기가 아니라 구린내지요. 꽃이 피었다 지고 매실이 열리자 마자 관에서 나와 열매를 헤아리더군요. 매화라는 게 달렸다가 다 자라기 전에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는 것인데, 미리 그렇게 헤아려 놓고 개수가 모자라면 다 채우라 하니, 생돈을 들여 매화 공출을 하지 않았겠소."
 
농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무적은 밭두렁에 앉아 커다란 매화나무가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온 어무적은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백성이 한 그릇 밥에 배부르면, 관리는 침을 흘리며 화를 낸다네/ 백성이 한 벌 솜옷이나마 입고 따뜻하면, 아전은 팔 걷고 달려들어 살까지 벗기네/ 내 향기는 굶어죽은 들판의 송장을 덮고, 꽃잎은 떠도는 백성의 백골에 뿌려지네…."
 
시의 제목을 '매화나무를 자르는 노래(斫梅賦)'라 붙이고 숨을 고를 때, 마침 글동무가 찾아왔다.
 
"기막힌 시가 아닌가. 혼자 보기 아깝구먼."
 
글동무는 여러 글동무들을 불렀다. 그들은 '매화나무를 자르는 노래'를 함께 읊으며 지방 관리의 폭정을 성토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무적이 시로써 김해부사를 조롱했다는 소문이 좌악 퍼졌다. 노발대발한 김해부사는 당장 어무적을 잡아들이라는 영을 내렸다. 평소 어무적을 존경하던 사령 하나가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기에 어무적은 영운마을에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렇게 김해를 떠난 어무적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매화나무로 상징되는 사대부적 감상의 세계를 과감히 잘라버리고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시인 어무적이 언제 어디서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은 연산조 때 문경새재에서 활동한 도둑 홍길동이 세종 임금 시대에 출현하여 서얼차별을 철폐하고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건설하는 이야기이다. 만백성이 어와어와 강구의 노래를 부르는 세상을 꿈꾸었던 어무적의 세계관이 훗날 허균에 의해 <홍길동전>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실제 홍길동이 의적이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바 없으나 어무적의 시와 시세계를 높이 평가한 허균 역시 서얼로서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치지 못한 처지였다. 당시로서는 위험하고도 파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허균에게 어무적의 시들이 실천 의지를 더해 주지 않았을까.
 
어무적의 고향 영운마을은 지금 폐쇄된 유락시설인 가야랜드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신령스러운 기운을 다 잃어버렸다. 이제는 그곳에 김해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 어무적의 문학비를 세워도 좋지 않을까.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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