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출신 파독간호사 작가 류현옥
40여년 경험으로 엮은 두번째 산문집


스판다우의 자작나무

류현옥 지음
전망/300쪽
1만 3000원

지난 겨울 극장가를 눈물로 적신 영화가 있다. 바로 질곡의 현대사를 힘겹게 살아 온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다룬 '국제시장'이다. 주인공 덕수는 자신의 꿈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로 광산 일을 하러 떠난다. 거기서 자신처럼 가난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온 파독간호사 영자를 만나게 된다.

영화를 보면 파독광부, 간호사들이 이국 땅에서 겪은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주인공 덕수의 첫사랑이자 아내인 파독간호사 영자가 시체를 닦는 장면은 관객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독일 간호사들은 기본적인 의료 행위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목욕, 대소변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간호사라는 직업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직업 중 하나이다.

이런 고단한 일을 40여 년간 해온 간호사 출신 류현옥 작가가 <베를린의 하늘>에 이어 두 번째 산문집 <스판다우의 자작나무>를 펴냈다. 작가는 1970년 가을, 달랑 여권과 한독사전 한 권을 가방에 넣은 채 고향 김해를 떠나 베를린으로 건너간 파독간호사이다. 그는 버터를 바른 흑빵을 먹으며 육체적 배고픔은 달랬으나 늘 온몸을 채우는 정신적 허기는 달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모국어로 쓰며 지독한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대학병원, 노인전문병원을 거쳐 호스피스병동에서 검은 머리 간호사로서 겪었던 힘든 일과 독일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군더더기 없이 진솔하게 들려준다.

생의 마지막 거처인 호스피스병동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가려는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동이다.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감정 노동까지 필요로 하는 곳이다.

실습생의 이야기를 다룬 '투르디 이야기'에서 작가는 "호스피스병동의 일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과정을 동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하며 저승으로 가는 길 앞까지 함께 가는 일, 이런 힘든 일을 하다 보면 삶과 죽음의 문제, 특히 존재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죽는 일은 곧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의 글 곳곳에서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어머니에 대한 글은 가슴을 먹먹하게 때론 뭉클하게 한다. '가을 길목에서 그리울 어머니', '어머님의 유산', '고향의 흔적'에는 반생을 떨어져 살면서 몸서리치게 그리워한 어머니를 돌아오지 못할 먼 길로 떠나보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옥아, 안방 장 속에 중요한 것이 들어 있어 잠가 놓았다. 열쇠는 장 위 오른쪽 모퉁이에 숨겨 놓았다."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장 속에 어머니가 고이 간직해 온 것은 가족사진첩, 작가가 독일에서 사다 준 양털로 만든 실내화 그리고 검은 색으로 변한 됫박이었다. 됫박은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물건이다.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나 혹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에게 쌀을 한 되씩 모아서 나누어 줄 때 쓰던 살림도구로 어머니의 이웃에 대한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유품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남긴 됫박을 고이 보자기에 싸서 가져가 베를린 자신의 방 컴퓨터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쪽지에 적어 됫박 속에 넣어 둔다고 한다. '어머니는 내 곁에 오래 지키고 앉아 딸을 위한 생각의 그릇'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유 모를 허기를 느끼며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글을 쓴다. 한국과 독일의 경계에서 늘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어 오히려 두 나라를 제대로 읽어낼 줄 아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사회의 맨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며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예리한 눈으로 들여다볼 줄 안다. 그래서 스판다우 숲의 자작나무처럼 하얀 외로움을 간직한 채 강인한 정신으로 곧게 살아온 작가의 글은 두 나라 모두에게 더욱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은주
시인/<신생> 편집장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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