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기타를 처음 잡아 보았을 때, 그 느낌이 너무 좋아 그만 기타에 푹 빠져 버린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친구의 기타를 빌려서 코드 연습을 했는데, 손가락 아픈 줄을 몰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 준 기타는 그가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나만의 기타'였다.
소년은 자라서 음악인이 되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라이브공연에서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는 김성훈(51)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김해지회장을 만났다.

 

 

▲ 연습실 거울 앞에 줄지어 세워진 기타.
중 1 때 친구집에서 처음 접한 기타
그렇게 혼자서 연습하며 배우기 시작해
친구들과 밴드 활동 하며 음악 심취

 

막내아들 연주 좋아했던 어머니 큰힘
건반·드럼·색소폰 등도 두루 섭렵
나만의 색 담긴 창작음악이 곧 자존심


김성훈의 연습실 겸 김해지회 사무실은 화목동 445-7번지 2층에 있다. 연습실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자 2층에서 드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드럼 연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로 협회 회원들이 와서 연주 연습을 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김성훈은 사무실에서 작곡을 하고 있었다.

김성훈은 1964년에 경남 창원 대산면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막내였다. "집 옆에 교회가 있었어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또래 아이들과 교회에서 주로 놀았어요. 목사가 아이들을 좋아했지요.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교회에 다니지도 않았으면서 우리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교회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함부로 못 만지게 했지만, 그는 구경을 하면서 건반을 살짝 눌러 보기도 했다. 피아노 치는 여선생이 그를  불러 피아노 치는 걸 가르쳐 줬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처음 눌러봤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부드럽고 매끈하고 신비로운 소리였다.

김성훈은 소리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옆에서 소리를 듣곤 했다. 집에 형과 누나가 불던 피리(리코더)가 하나 있었다. 그걸 주워 혼자서 소리 내는 법을 익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저의 몸에 맞는 지게를 만들어주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일해야 하는데 피리나 불고 다닌다.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는 말도 했어요. 아버지는 전형적인 농부였지만 어머니는 개방적이었어요. 주산학원이나 합기도 학원에 저를 보내줬죠. 초등학교 때는 음악시간을 좋아했어요. 노래를 잘한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활 활동도 음악반에서 했지요."

김성훈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서 기타를 처음 보았다. "기타 코드를 처음 잡았을 때는 손가락이 아팠지만 자꾸만 잡아보고 싶었어요.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그렇게 기타를 혼자서 배웠지요. 친구 것이었지만 제가 더 많이 쳤어요. 누구의 기타인지 모를 정도였지요. 기타를 한 번 빌려 오면 며칠 동안 안 돌려주고 실컷 치곤 했지요."

 

 

 

 

▲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할 때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습니다." 김성훈이 드럼 앞에서 일렉기타를 들고 음악과 함께 해 온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성훈은 동네 형이 기타를 치면서 팝송 'The House Of Rising Sun(해 뜨는 집)'을 부르는 걸 듣고는 반해버렸다. 기타 코드가 어렵지 않아 금방 배워버렸다. 팝송, 대중가요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배웠다. 영국의 록그룹 스모키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크랩톤의 음악, 벤처스의 파이프라인을 아주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소풍을 가면 친구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그는 기타를 쳤다. "그때 한창 유행했던 음악인 'YMCA', '징기스칸' 같은 곡들을 룸바 스타일로 연주했어요. 인기요? 그런 건 잘 몰랐고, 그럴 정신도 없었어요. 집안일을 도와야 했거든요. 친구들한테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김성훈은 기타와 문학을 좋아했던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소년이었다. 수업시간에 교사는 그에게 '시를 읽어봐라, 노래를 불러봐라'고 했다고 한다. 교내 글짓기 대회 때 자신의 글과 친구의 글을 직접 다 써냈는데 친구만 상을 받아 속상했던 적도 있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이수익의 '우울한 샹송' 등의 시를 외워 다니곤 했다. 그는 '우울한 샹송' 중의 한 구절인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를 읊었다.

김성훈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진영제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교생이 되자 학교 친구, 학교 밖 선배 등 음악을 좋아하는 또래들끼리 자연스레 모이게 됐다. 밴드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친구 중 한 명이 밴드 연주를 할 수 있는 악기를 갖춘 과수원을 소개받아 그 곳에서 연주를 했다. 자취를 하는 친구 집에서 기타를 치기도 했다. 유흥업소가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 낮에 가서 악기 구경도 했다. 가끔 사정사정해서 그 악기들로 연습을 할 때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어머니는 몸이 아팠지만 막내아들이 기타를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타를 사 줬어요. 집에 돈도 없었을 텐데…. 스피커가 달린 통기타, 비싸고 좋은 기타였어요. 기타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옛날 트로트 곡을 들려드리면 좋아했죠. 이런 곡이었어요."

 

 

 

 

 

 

김성훈은 기타 피크를 꺼내 트로트 한 대목을 연주했다. 어머니는 혹시 아들이 걸어갈 길을 알고 응원해준 것이 아닐까. "친구들의 기타도 빌려서 치거나 물려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 기타가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사 준 건 새 기타였고 온전히 제 것이었어요. 처음으로 생긴 기타여서 애지중지했죠. 아무도 못 만지게 했고 빌려주지도 않았어요." 아들의 연주를 듣고 그렇게 좋아하던 어머니는 얼마 후 별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성훈은 작은 방위산업체 회사에 취업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기타를 배우러 부산의 대한음악학원에 다녔다. 김영수 원장은 KBS방송국에 다니던 실력있는 기타리스트였다. "면담을 한 뒤 원장이 기타 강사를 하라더군요. 강사를 하면 자신의 연주를 사사하게 해준다는 조건이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음악학원에 가서 강사를 하고 배우기도 했죠."

김성훈은 그러다 계속 음악을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뒀다. 본격적인 음악인으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건반, 드럼, 베이스기타, 일렉기타, 색소폰 등을 다 섭렵했다. 연주활동을 할 때는 일렉기타를 맡지만, 사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베이스기타라고 한다. 그는 음악 강사들 중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팀을 만들었다. '초록빛 바다'라는 팀 외에 여러 팀을 만들었다가 해체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했다. 나이트클럽 등에서 고정 팀이나 찬조 출연자로 연주도 했다.

김성훈은 그 시절 주위에서 기타를 잘 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진짜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한 밴드 마스터를 만났죠. 업계에서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진짜 실력자, 강호의 고수였어요. 그는 제 기타 연주를 듣더니 '기타 치는 게 비포장도로'라고 평가했어요."

진짜 실력자를 만나 충격을 받은 그는 음악을 접고 1984년 12월 군에 입대했다. 3년 뒤 제대하고 나서는 중소기업체에 입사해 5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자 동료 음악인들이 '돌아오라'며 애타게 그를 찾았다. 음악이 그리웠던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산에서 '그 밴드 마스터'가 이끄는 팀에 우연히 세션으로 참가했다. 연주를 마친 뒤 밴드 마스터와 서로 "이제 기타가 아스팔트가 됐냐"고 농담을 했다. "말 한마디가 가르침이 됐던 이 분야의 스승이었어요. 그를 만난 뒤 '건방'을 버렸어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실력자를 만날지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성훈이 김해로 이사를 온 것은 15년 전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김해지회 회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진영단감축제 공연 때였어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거기서 아는 사람들을 다 만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자신들의 사연을 떠올려 주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며 울기도 했죠. 무대 뒤로 와서 치마나 두루마기 자락을 들춰 쌈지돈을 꺼내 주기도 했어요. 끝없이 앙코르 요청이 나기도 했고요. 장비를 철거한 뒤에도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보고 있었어요. '집에 그만 가이소' 라고 말하곤 했어요. 참 재미있고 가슴 뭉클한 공연들을 많이 했지요."

그는 가수 김영춘 씨 이야기도 했다. "협회에서 김영춘가요제를 추진했어요. 친일파 논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중단됐지요. 김해에서는 꼭 김영춘가요제를 해야 합니다. '홍도야 우지 마라'는 김해의 진정한 18번이자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노래예요. 이런 것이 지역의 문화 브랜드입니다."

김성훈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로 만드는 창작음악,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배워서 하는 음악은 다 똑같아요. 제가 작곡하고 만든 음악. 저는 창작을 하는 음악인 김성훈입니다." 그는 연주를 할 때, 많은 관객들이 음악을 들으며 즐거워할 때 행복하다고 했다. "라이브 연주는 호흡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소리도 달라지지요. 관객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노래하고 연주하면 힘든 줄도 몰라요.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거지요.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습니다." 

≫김성훈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김해지회 지회장, 공연기획사 운영.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고마우신 분', '당신뿐이랍니다', '아름다운 사람' 외 다수 작곡. 김해지역 학교 밴드 강사로 활동.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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