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씨알은 외롭지 않다>
김정권 전 국회의원

고교 시절, 형의 책장에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라는 시사월간지를 보고 함석헌 선생에 매료됐다. 그날 이후 그의 책을 섭렵하듯 읽기 시작했다. 함석헌 선생의 생각과 글들은 결국 청년기 이후 내 삶의 가치관과 성격에 투영됐고,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학창 시절 함석헌 선생에 빠져 있던 내게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가 책 한권을 생일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특히 평생동안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책이 됐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는 독특한 유형의 문장으로 인생, 역사, 민족, 종교,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왕이다. 돈만 있으면 지식 있는 놈의 지식을 사 쓸 수 있고 칼 든 놈의 손을 칼 든 채 잡아 부릴 수 있다. 그 뿐인가. 덕이 높은 성인까지 사서 앞세우고 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식 걱정마라. 힘없는 걱정마라. 잘못한 걱정마라. 돈 벌어라. 그저 돈만 벌어라.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는 얼이 임금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무슨 방법으로도 얼을 길러라. 얼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얼이 모든 것이다. 얼이 무엇이냐고 묻는가. 얼은 얼이다. 얼을 얼이라 해서 못 알아듣는 것은 얼빠진 사람이다. 얼이 빠지면 사람이 아니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 중에서 이런 내용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신선한 충격에 빠져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당시 시대적 아픔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면서 우울에 빠져 있던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는 듯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정의하면서도 고난을 좌절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상승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나라보다도 고난의 경험이 많고 이를 잘 극복하여 왔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도 했다.

청년시절에는 '나뭇가지가 고요히 머무르려 해도 바람이 멎어주지 않아 흔들리는' 것처럼 방황했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는 그런 나에게 인생의 갈래길 중에서 찾아나가야 하는 길을 보게 해 주었다. 그의 사상적 세례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근원이 됐다.

금서로 이미 폐간됐던 <씨알의 소리>는 해금 이후 영인본을 사서 보고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책을 사기 위해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빠져 물질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다른 이의 눈에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으로 보였는지, 불순한 반골 청년으로 비춰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동안 살면서 얼빠진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는 것이다. 이제는 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좌절과 고통은 또다른 경험이고 자산임을, 상처를 딛고 피어나는 향기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이다.

'고난은 죄를 씻어준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한다.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원에서 솟아오는 향기가 높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한다.'





≫김정권/제5~7대 경남도의원, 제17~18대 국회의원, 원내부대표·원내대변인·사무총장 역임, 경남발전연구원 원장 역임.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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