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산동 지석묘 발굴 현장 전경.
가야 하면 김해, 김해 하면 가야를 쉽게 떠올릴 만큼 김해와 가야문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김해에는 가야 건국 이전에도 많은 선조들이 살았고 또 그들이 남긴 뛰어난 문화재도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작 김해에서 전국 최고도 아닌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문화재 2개소는 모두 가야시대 이전의 것이다.
 
김해 땅에 인류가 거주한 이후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구석기시대의 것은 불행히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몇몇 확인되었지만 도로 공사 등으로 인해 이미 파괴되어 현재 지정된 문화재는 없는 실정이다.
 
김해에서 지정된 문화재 중 가장 시대가 앞 선 것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추장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괸 돌(지석·支石)이 뚜껑돌(상석·上石)을 받치고 있는 독특한 구조로 인해 붙은 이름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김해의 고인돌은 모두 수백 기가 훨씬 넘으나 이 중에서 지정되어 그나마 관리되고 있는 것은 서상동지석묘(도 기념물 제4호)와 내동지석묘(도 기념물 제97호), 장유 무계리지석묘(도 기념물151호) 등 3기밖에 없다.
 
이중 서상동지석묘는 임진왜란 때 4충신 중의 한 분인 송빈 선생이 순절한 바위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바위는 1820년대에 그려진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도 그려져 있는 이름난(?) 고인돌이다. 지도에 부암(浮岩·뜬 바위)으로 적혀 있는 이 고인돌은 뚜껑돌이 받침돌 위에 높이 올려져 있는 독특한 구조로 인해 조선시대에도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동지석묘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현재 사랑병원 인근 주택의 담장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나 상석만 국립김해박물관으로 따로 옮겨져 있다.
 
상석 무게만 350t넘는 규모지만 예산 등 문제로 미발굴 상태 방치
봉황동유적 패총 두께 8m50㎝ 일본 패총 능가 최대 깊이 자랑

구산동 택지개발구역 내 공원 지하에 묻혀 있는 구산동지석묘는 무덤 영역의 폭이 19m, 너비가 86m가 넘고 상석의 무게만 무려 350t이 넘는다. 현재까지 5만 기 정도 확인되어 전 세계에서 지석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국내의 지석묘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커서 세계 최대의 고인돌로 인정받고 있다. 40t의 뚜껑돌을 옮기는 데 약 500명 정도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니 이 고인돌의 주인공이 얼마나 큰 세력의 주인공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적 문화재는 예산이나 발굴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아직 미발굴 상태이다. 내동에 살던 원주민들이 소바위(우암·牛岩)로 부르던 큰 바위. 지금은 비록 여러 가지 여건상 땅 속에 묻혀 있지만 조만간 문화재로 지정하고 장기적인 발굴 및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그 웅장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아파트가 밀집한 내외동은 가야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바닷물이 들어온 만(灣)이었으며, 김해평야는 큰 바다였다고 한다. 이 같은 해안선의 변동을 잘 알려주는 자료가 바로 조개무지(패총·貝塚)인데, 패총은 당시 사람들이 잡아먹은 조개 껍데기와 새나 짐승뼈, 생선뼈 등과 함께 못 쓰게 된 각종 도구 등도 버려져 있는 일종의 쓰레기장으로 당시의 자연환경 복원에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봉황동유적(옛 회현리패총·국가사적 제2호)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넘은 1907년에 국내 최초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부터 이 패총을 십 수 차례 발굴한 까닭은 학술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한일합방의 역사적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4국시대에 일본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발굴한 것이다.
 
▲ 구산동 지석묘 현장(왼쪽) 일본인들의 회현리 패총 발굴 장면(오른쪽)

2005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곳을 재발굴하여 단면 전시관을 건립했는데, 패총의 두께가 무려 8m50㎝를 넘었다. 이 또한 4면이 바다인 섬나라로 지형상 패총 숫자가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일본의 패총 규모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깊이다.
 
패총의 구성 성분은 대부분 굴 껍데기인데 요즘 굴과는 달리 크기가 무려 40㎝를 넘는 것도 즐비하다. 그런데 겨울철 가야인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을 이 굴의 껍데기가 단순히 버려진 것이 아니라 철기를 제련하기 위해 특별히 모아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철광석에서 철 성분을 추출할 때 조개 껍데기가 낮은 온도에서 철광석이 녹을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가야인들은 '꿩 먹고 알 먹은' 게 아니라, '굴 먹고 껍데기 태운' 일거양득의 지혜를 발휘한 셈이다. 이미 1700년도 전에 음식물쓰레기(?)를 재활용한 가야인들의 아이디어가 놀랍다.
 
장유 유하리에도 패총(도 기념물 제45호)이 있으나, 현재까지 학술적으로 정식 발굴된 적이 없다. 다만 채집된 유물로 보아 가야시대로 대략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앞으로 정식으로 발굴된다면 또 어떤 소중한 문화재가 우리를 놀라게 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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