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범지 박정식
1.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은 서기 42년 김해지역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199년 수로왕이 죽고 그 아들 거등왕이 대궐에서 동북쪽에 능을 조성할 때의 이야기다. 장사를 지내려고 인부들이 흙을 파기 시작하자 난데없이 큰 물길이 묘 한가운데 솟구쳐 도저히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거등왕은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함께 온 신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신보가 물길을 잡을 방도를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한 도인이 나타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를 파라고 일러주었다. 신보는 거등왕에게 사실을 아뢴 뒤 무리를 이끌고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생림면 무척산에 올랐다. 인부들이 산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곳을 파 들어가니, 갑자기 물길이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묘지 공사를 하던 곳의 물줄기는 뚝 끊어졌다. 묘역 공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무척산 정상에는 '천지'라는 못이 생겼다.
 
거등왕은 묘역에 숭선전이란 사당을 지어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정월 초사흘과 이렛날, 오월 단오날, 그리고 팔월 초닷새날과 보름날에 성대하고 깨끗한 제사를 올렸다. 이렇게 비롯된 숭선전 제사는 가락국이 존속하는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다가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되자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쓸쓸하게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도록 한 것은 신라 30대 문무왕이었다. 사실 문무왕에게는 가락국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손자가 솔우공이고, 솔우공의 아들인 소판 김서현의 딸 문명황후가 문무왕을 낳았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문무왕은 가락국과의 깊은 인연을 잊지 않고 소출이 많이 나는 상등급의 전답인 상상전(上上田) 30경(頃)을 내려 숭선전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결(結) 혹은 경(頃)으로 토지의 면적과 등급을 나타내던 이 시기에 본다면 30경은 30결에 해당한다. 1결의 면적을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수확되는 곡식의 질과 양에 따라 약 1.5~6㏊에 이른다.

2.

신라말 잡신 섬기던 '아간' 영규
숭선전서 풍악 울리며 제사 시도
천장서 떨어진 대들보 깔려 즉사

보물 노린 도둑 연이어 전각 침입
키 팔척 용사 나타나 순식간 응징
초대형 구렁이 등장 모두 몰아내기도
 

신라 말 혼란한 시기에 잡간 충지가 병사를 이끌고 김해성을 침공했다. 충지는 성주를 자처하며 김해를 마음대로 다스렸다. 그때 충지에게는 영규라는 아간이 있었다. 당시 신라를 비롯하여 옛 가락국에도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충지의 충복인 영규는 잡신을 섬겼다. 영규는 자기가 섬기는 잡신에게 제사를 올릴 장소를 물색했다. 그때 영규의 눈에 들어온 것이 정갈하고 위엄을 갖춘 수로왕의 사당 숭선전이었다. 
 
영규는 충지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숭선전에 모셔져 있는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치워 버렸다. 청천벽력 같은 사태 앞에 후손들이 항의했으나 영규는 무력을 동원해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단오날을 기해 잡신들을 위한 제사를 거창하게 준비했다. 울긋불긋하게 숭선전이 치장되고 요란한 풍악소리와 함께 잡신들을 위한 제사가 시작되었다. 영규는 제단 앞에 나아가 절을 올렸다. 그때 천장의 대들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더니 영규에게로 떨어졌다. 영규는 대들보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숭선전 주인이 노한 것이라 말하면서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말았다. 
 
영규가 숭선전에서 잡신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다 대들보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충지는 등골이 오싹했다. 수로왕릉은 영물들이 지키고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는데, 영규가 일을 당하고 보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충지는 허겁지겁 숭선전으로 가서 영규가 차려놓은 제단을 치우고 잡신의 신위를 불살랐다. 그리고 화공을 불러 비단에 수로왕의 화상을 그리게 했다. 화상이 완성되자 벽에 걸고 촛불을 켠 다음 정갈한 음식을 마련해 올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하면 수로왕의 노여움이 풀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 지 사흘 째 되던 날, 제물을 차려 들고 숭선전을 찾은 충지는 혼비백산했다. 벽에 걸린 수로왕 화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숭선전은 온통 피바다였다. 충지는 너무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숭선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사를 불러 의논했다. 
 
"숭선전 제사는 이제까지 수로왕의 후손들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잡신을 불러들이고, 또 엉뚱한 사람이 화상을 그려 붙이고 하니 혼령이 노한 것이 분명합니다. 수로왕의 직계후손으로 하여금 다시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도인 듯합니다."
 
충지는 도사의 말에 따라 화상을 떼어 불사르고, 시조왕의 직계후손인 김규림으로 하여금 숭선전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김규림은 충심으로 숭선전의 제사를 받들었다. 직계후손이 제사를 받드는 동안 숭선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와 허왕후의 후손인 김해 허씨는 시조왕이 나라의 안위는 물론이고 가계까지 돌본다고 믿었다. 실제로 어느 해에는 숭선전에 도둑이 들었는데, 도둑이 전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눈이 부리부리하고 키가 팔 척이나 되는 용사가 나타나 활을 마구 쏘아서 순식간에 일고여덟을 죽여버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도둑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난 것은 물론이겠다. 또 한 번 도둑이 들었을 때는 엄청나게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도둑들을 마구 물어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숭선전의 제사를 받들던 김규림이 여든여섯에 세상을 떠나자 숭선전 제사는 아들인 김간원이 맡았다. 김간원은 매년 정해진 날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해 단오날에 숭선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영규의 아들 준필이 제물을 준비해서 들이닥쳤다.
 
"여기는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이다. 이제부터 단오날 내 아버지 제사는 여기서 지낼 것이다."
 
준필은 데리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김간원이 차려놓은 제물을 치우게 하고, 자기가 가져온 제물을 진설하게 했다. 그리고 술을 따라 제상에 올리고 절을 했다. 김간원과 후손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준필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위협하는 바람에 속수무책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의기양양 세 번째 술잔을 올리려던 준필이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졌다. 함께 온 사람들이 허둥지둥 집으로 옮겼지만 준필의 목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3.

고려 성종 양전사업 조문선 파견
왕릉 관리용 토지 절반 삭감 결정
밤마다 귀신 악몽 도주하다 사망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20년에 한 번씩 양전사업(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양전사(농토를 측량·등록하는 관직)는 그 지역 사정에 밝은 양반 중 한 사람을 감관(監官)으로 삼고 양전사업을 시행했다. 백성을 해치지 않고 나라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양전사업의 기본원칙이었다.
 
고려 성종 10년(991)에 김해부 양전사업을 위해 조문선이라는 사람이 파견되었다. 조문선은 수로왕릉의 제사를 위해 책정된 토지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다. 수로왕릉의 제사를 위해 관리되고 있는 토지는 신라 시대 문무왕이 내린 상상전 30결이었다. 통일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벼 한 줌인 1악(握)을 1파(把),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로 책정하던 때였다.
 
조문선은 왕위전의 30결 중 15결을 떼어 양전에 동원된 김해부 부역 담당 장정들에게 나누어 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해당 관청에 내놓았다. 그때 김해부의 어떤 사람이 수로왕릉이나 숭선전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토지 또한 절대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문선은 고집을 피웠다.
 
"내가 이 땅을 가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쓰겠다는데 귀신이 있다 한들 어쩐단 말이냐?"
 
조문선이 완강하게 버티자 관청에서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내린 대답은 뜻밖이었다.  
 
"하늘이 내린 알이 거룩한 사람으로 화하여 왕이 되었고, 세상의 나이 일백쉰여덟세를 누리셨다. 삼황(三皇·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어진 세 군주) 이래 견줄 자가 누구인가? 가락국이 비록 없어졌다 하나, 선대 때부터 사당에 소속되어 있던 땅을 지금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조문선은 뜻을 꺾지 않고 재차 청했다. 그랬더니 조정에서도 조문선의 뜻을 받아들였다. 조정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문선은 30결의 토지 중 절반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절반은 지방의 부역 일꾼들에게 나눠주었다. 토지 문서에 도장을 찍는 일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조문선은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는데, 조문선의 꿈에 예닐곱이나 되는 장정들이 오랏줄과 칼을 들고 나타났다.
 
"네가 지은 죄를 모르겠느냐? 목을 베어 버리겠다."
 
우락부락한 장정들이 으름장을 놓으며 꽁꽁 묶고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조문선은 꿈에서 깨어났다. 조문선은 숭선전의 토지를 줄인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내켜하지 않는 것을 혼자 밀어붙인 일이었기에 어디 의논이나 하소연을 할 데도 없었다.
 
"내가 그 땅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것도 아닌데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조문선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다음날도 같은 꿈을 꾸자 더럭 겁이 났다. 온몸에 열이 나고 쑤시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레 동안 내리 같은 꿈을 꾸고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자 조문선은 겁에 질려 몰래 김해부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열이 내리지 않은 채 도주하던 조문선은 김해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양전사가 도망을 치다 죽어 버렸으므로 당시 양전 토지대장에는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뒷날 다른 양전사가 명을 받들고 와서 숭선전에 속한 토지를 자세히 살폈더니 15결로 나뉜 부분에서 부족분이 3결 87부 1속이었다고 한다. 조문선의 꿈에 나타났던 장정들은 잘못된 토지대장을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수로왕릉에 얽힌 이 이야기의 진위야 어떻든, 수로왕릉은 지금도 가락국 고도 김해의 한가운데서 김해의 어제와 오늘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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