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아버지
송기역
후마니타스/315쪽
1만 5000원

박정기, 아들 잃고 30년 '늦깎이 투사'
전태일 어머니 고 이소선 등 이야기도

"1965년 4월 1일생. 2000년이 되면 36세라고 한다. 깜짝 생각만 하면 정말 자지러진다. 마음이 매우 아프다. 나이 36세이면 과연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 것이며 사회에 어떤 봉사자로 임하고 있을까. 철아, 그래도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그립구나. 한참 생각해도."
 
스물 세 살에 세상을 떠난 박종철. 그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박정기 씨가 2000년 4월 1일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박종철. 그 이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름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아버지 박정기 씨는 어쩌면 아들의 이름을 가슴에 화인으로 찍었을 것이다. 박정기라는 이름보다 '종철이 아버지'로 불리는 시간을 살아온 지 어느새 30여 년이다. 여든여덟의 노인이 된 그가 견뎌온 가혹한 시간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1987년 1월 14일,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 정년퇴임을 한 해 앞 둔 그는 동네목욕탕을 관리하며 살아갈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천금 같은 막내 종철의 부고가 전해졌다. 청천벽력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시련 앞에서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아들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발걸음에 이어 자신의 길을 내딛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30여 년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을 하며 살아왔다. 그 시간은 그의 아픈 다짐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새롭게 엮어 구성한 것이다. 박정기가 구술했고 송기역 작가가 글을 썼다. 송 작가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박정기는 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1987년부터 유가협에서 활동했다. 유가협 회원들은 분신해서 죽고, 투신해서 죽고, 음독으로 죽고, 고문으로 죽고, 의문사로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사는 부모들이다. 이들은 꿈에서라도 자식이 나타나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나도 꿈속에서 철이를 만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그냥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죽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임진강에서 아들을 보낸 후 부산으로 내려오며 내내 생각했다. "종철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극한의 고통이 동반된 고문을 견디며 아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들은 목숨과 맞바꾼 걸까?"
 
국민들은 박종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자비한 고문에 분노했고, 마침내 6월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장면을 아버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시민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의 글귀를 보고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임진강에서 철이의 유해를 뿌릴 때 내가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그 순간 6월의 거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그날 늙은 투사의 심정으로 거리에서 싸웠다.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들도 모두 늦깎이 투사들이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그렇게 '유월의 아버지'가 됐다. 그 뿐이겠는가.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식을 잃은 뒤 다시 태어나 살고 있다. 최루탄에 아들 이한열을 잃은 어머니 배은심은 이 땅에서 다시는 최루탄이 쓰이지 않게 하겠다며 싸웠고,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이끌었고 '노동자의 어머니'로 영원히 살고 있다. 그리고 대공분실에서 아들을 잃은 박정기는 '고문없는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의문사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했다.
 
이 책에는 유월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들을 보낸 후 적은 아버지의 일기장. 그 구절들이 각 장의 앞머리를 장식한다. 본문을 읽기 전에 마주치는 그 짧은 문장에 자식을 잃고 살아가는 아비의 처절한 울음이 배어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박정기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이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박정기는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했다. 그 시절의 저항과 연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는 게 인생의 남은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동안 독자들은 몇번이고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 그 독자들에게 박정기가 손을 내민다. "나는 종철이 아버지입니데이. 힘내이소."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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