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잘 그리고,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이 있었다. 나중에 자라서 음악인이 되면 노랫말을 쓰리라 생각하며 시를 썼다. 그러다 그는 시인이 되었다.
그가 좋아했던 음악세계는 그의 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는 환상적이다. 어떤 시는 동화 같고, 다른 어떤 시는 공상과학영화 같기도 하다.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적어 두었다가 시로 썼다는 김참(42) 시인이 바로 그다. 그의 시세계를 이룬 삶의 여정, 아니 취미의 여정을 들어보았다. 

고교 때부터 프로그레시브 록 등 심취
등단 이전까지 1천 편 이상 습작 써
대학생 때 '문학사상' 당선 등단
'문학과 사회' 시 실리며 유명세
손택수 등과 '청동시대' 동인 활동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공부를 하는 작은 방이에요."

김참 시인은 안동에 있는 작은 공부방을 소개했다. 양옥집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자 다육이 화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가 취미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화분마다 이름을 적은 작은 팻말도 붙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에게서 시 이야기보다 취미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루와 방에 가득 찬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도 책이 많다고 한다. 창문 앞에 있는 작은 책상 위로 햇살이 환히 비쳤다. 책꽂이 앞에는 기타도 세워져 있었다. 다육이 화분, 기타, 책, 그리고 시인. 뭔가 잘 어울리는 조합같았다.

김참은 경남 삼천포 죽림동, 대나무가 많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주로 북구, 사상구에서 살았다.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이름이 본명이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아버지가 4형제 이름을 전부 순한글 이름으로 지어주셨습니다. '참되게 살라'는 뜻을 담아 제 이름을 '참'이라 지었을 때, 할아버지가 '의미는 좋지만, 네 아들이라고 이름을 네 마음대로 짓느냐'고 이야기하셨답니다. 이름 덕을 많이 봤어요. 등단한 후 제 시를 본 사람들이 이름을 쉽게 기억해주더라고요." 그래도 학창시절에 놀림을 더러 받았을 것 같다. "놀림을 받을 때도 좋은 의미였던 것 같아요. '참아, 참아라', '참아, 참 먹고 하자'는 정도였죠."

김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소설 나부랭이나 읽는다고 혼내기도 했지만, 사실 가족 모두 책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학창 시절까지 고전과 명작을 읽었다. "어머니가 250권짜리 문고를 사 주셨어요. <보물섬>, <로빈슨 크루소> 등을 읽었어요. <열국지>, <삼국지>, <서유기> 등은 중학교 1학년 때 읽었어요. 제가 읽은 책 중에서 최고는 <오즈의 마법사>예요. 대단한 책입니다. 문장이 예술이죠. 저는 환상적인 책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시도 이야기가 있는 서사적 구조를 가진 환상적인 시를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림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그림을 두 세장 씩 그리곤 했다. 미술부 활동을 중학교 때까지 했다. 미술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미술부 친구 중 한 명은 현재 화가이다. 그는 "왜 네가 화가가 안 되고, 내가 화가이지"라고 말한단다. 그는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푹 빠져드는 성격이었다. 우표 수집에도 열심이었다. 그때의 우표 앨범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헤비메탈, 록 음악을 열심히 들었지요. 그러다가 프로그레시브 록에 빠졌어요. 새로운 세계였어요. 음악을 듣는 귀가 열리는 기분이었어요." 프로그레시브 록은 1960년대에 발생한 록의 한 장르다. 상업적 조잡함을 탈피한 음악이다. 하드록에 클래식의 곡조 등을 차용한 변화무쌍한 영국계 그룹들의 연주를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웅장한 사운드와 초현실적인 메시지가 특징이다.

"인제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 뒤로는 음반을 많이 샀어요. 우리나라에서 정식 판매가 안 돼 구할 수 없는 음반은 해적음반으로 나와 있었지요. 남포동에 가면 음반들을 구할 수 있었어요. 용돈을 모으거나,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아껴 음반을 샀죠."

그렇게 모은 LP 음반이 2천장 정도였다. 후배들이 집에 와서 슬쩍 가져가도 몰랐다. 군대에 다녀오니, LP가 CD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CD에는 별로 정감이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P2P 프로그램을 이용해 많은 나라의 온갖 음악을 다 들었다. 국악도 들었다.

시인을 인터뷰하는 건지, 음악인을 인터뷰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김참은 음악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의 많은 취미 중 대표 취미는 음악 감상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죠. 손가락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쳤지요. 즉흥연주를 특히 좋아했어요. 지금도 기타를 4개 갖고 있답니다. 일렉트릭 2개, 클래식 1개, 포크 1개. 밴드활동을 하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아마 그때는 당구를 치느라 안 했던 것 같아요. 대신 밴드매니저를 했지요."

당구라고? 김참은 당구도 좋아했단다. 대학 재학 중 등단했을 때 "당구장에 있던 사람이 언제 시를 썼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바둑은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다. 6학년 때 6급이던 실력이 아직 그대로다. 한때는 민물고기도 키웠다. 한참 빠졌을 때는 집에 크고 작은  어항이 10개 정도 있었다. 집에 와서 자고 간 후배들이 '바다 속에서 잔 것 같다'고 했을 정도다. 어떤 때는 춘란을 키웠고, 다육이는 지금도 키우고 있다.

시는 언제부터 쓴 것일까. 다양한 취미활동의 여정을 들은 다음에야 드디어 시 시야기가 나왔다. "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썼어요." 그는 시를 쓰려고 해서 쓴 게 아니었다고 했다. 수학시간에 옆에 앉은 짝이 시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도 한 줄 써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친구와 한 줄씩 썼는데 재미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교내백일장에서 상을 받았고, 시가 교지에도 실렸다. 그렇게 공책에 시를 쓴 게 40권가량 된다. 등단 이전까지 1천 편 이상을 쓴 셈이다. 그 많은 습작이 김참을 시인으로 만든 것이다. "시를 쓰는 게 재미있었어요. 시를 안 쓰면 잠이 안 왔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험공부 틈틈이 시를 썼죠. 음악을 주로 듣고, 시는 재미삼아 썼어요. '나중에 음악인이 되어서 가요를 만들게 되면 가사를 붙이리라' 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시인이 됐네요."

▲ "꿈과 환상은 저의 시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김참 시인 작은 공부방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군대를 다녀온 2학년 때, 그러니까 1995년이다. 그는 시전문지에 신인상 공모문이 게재된 것을 보았다. "그동안 써놓은 시가 많으니 잡지에나 한 번 보내볼까 했어요. 첫 번째 보낸 잡지가 <현대시사상>이었어요. 최종심에서 탈락했죠. 그런데 심사평에서 제 이름을 보고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신기했지요. 쓰면 되겠다 싶었어요. 다른 작품을 <문학사상>에 보냈는데 당선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승훈 선생이 현대시사상에서 심사했고, 문학사상에서도 심사했다고 하더군요."

김참이 당선된 뒤 인제대학교에 두어 달 걸렸던 현수막의 축하 문장은 이랬다고 한다. '참 잘했어요.'

등단 이후 얼마간은 답답했다. 1년간 아무도 원고 청탁을 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투고도 했지만 실리지 않았다. 그때 무력감을 느꼈다. 이렇게 묻히는 건가 싶었다. 1년 정도 지나서 인제대 황국명 교수가 <오늘의 문예비평>에 시를 실어주고, 이승훈 선생이 문예지에도 실어주었다. 개성이 있다, 특이하다, 는 평을 들었다. 1997년에는 <문학과 사회>에 시 3~4편을 실었다. 그 무렵부터 청탁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 시를 써 보내고 원고료를 받았지요. 청탁을 받으면서 시 쓴다는 기분, 내가 시인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지요.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였는지 시를 쓸 때 좋다, 잘 썼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점점 알게 됐죠.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잡지에 실었던 시를 시집으로 낼 때는 다시 고칩니다."

김참은 1997년 손택수, 최갑수, 이찬, 하상일, 허정 등과 함께 '청동시대' 동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에는 동인지도 냈다. "동인활동이 점점 사라질 무렵이었어요. 부산의 선배 문인,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거의 마지막 동인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김참의 시는 환상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리얼리즘 문예사조는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주류였고, 1990년 중반까지 한국문학을 지배했지요. 그 이후 사회가 바뀌면서 문학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꿈, 환상은 시 쓰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도 삶의 한 축이에요. 꿈과 현실을 오가는 가죠. 현실에서는 인간사회의 규칙을 지켜야 하기에 자유롭지 못해요. 환상적인 문학은 그것을 깨는 거죠. 낮(현실)은 육체의 감각기관이 지배하지만, 밤(꿈)은 정신과 영혼의 세계입니다.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았으나, 시를 쓰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시가 환상적인 것은 음악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김참은 습작시절에 꿈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습관이 현재의 시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서 '어렵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기존의 전통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낯선 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에요. 저도 독자와의 소통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시는 예술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내 시는 아름다운가'라고 자문하면서 시를 써 왔습니다. 시류에 편승하거나 유행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더 깊이 있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저의 스타일입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 시를 쓰면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저만 느끼고 있습니다." 

≫김참/시인. 1973년 경남 삼천포 출생. 199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문학세계사, 1999) <미로여행>(천년의 시작, 2002) <그림자들>(서정시학, 2006). 1999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인제대 강사.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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