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시 부원동 새벽시장의 노점상들. 1999~2002년 사이 시외버스터미널이 옮겨간 자리에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며 형성됐으며 지금은 김해의 대표적 상징물처럼 서민생활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오늘은 왕년의 메인스트리트를 걷는다. 아니, '왕년'이란 과거형은 온당치 못하다. 가락로 상권의 부활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상인분들과 부원동 마을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민센터, 시청 관련 공무원들께도 실례되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마산 가는 국도 개설 이래, 어방동 인제대 앞거리나 내외동 중앙로의 등장 이전까지 국도 14호선이 시내 남북을 관통하는 가락로는 언제나
메인스트리트였고, 그 양편에 형성된 상권의 규모와 밀집의 정도에서 가락로는 여전히 김해의 메인스트리트다. 신도시의 개발도 좋지만, 여기 사람이 모여야 김해다운 발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번에 걸음을 멈췄던 중부경찰서를 나서, 김해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김해삼성병원을 지나, 가락로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가 바로 메인스트리트의 입구고, 가락로의 시작이다. 이 거리가 새 아침을 맞이하는 풍경은 독특하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회사원들이나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종종 걸음질치는 남녀학생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경남은행 앞뒤에서 작은 포터와 손수레에서 짐을 풀거나, 자전거나 머리 위 봇짐에서 물건을 내리는 중장년 어르신들이야말로 이 거리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짐을 풀고 좌판을 차리는 움직임 역시 그리 바쁘지 않다. 한참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아침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마침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김해새벽시장의 시계에는 조바심이 전혀 없다.
 

▲ 가락로 삼거리. 옛 메인스트리트의 명성을 말해주듯 길 양쪽으로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1984년 4월 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상점들이 늘어났고, 1999~2002년 사이에 외동으로 터미널이 옮겨가자, 버스주차장의 빈터에 임시로 자리를 펴는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얼마 되지 않아 세명약국 뒤의 'ㄷ'자 건물 중앙에는 '김해새벽시장'이란 간판도 나붙게 되었다. 80인 이상을 헤아리는 상인들이 아침마다 파라솔 아래 물건을 진열하고, 가락로와 김해대로 쪽의 인도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좌판으로 넘쳐나는 난전이 되었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마침 김해장날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열리고 닫힌다는 설명에 다시 놀라는 것도 항다반사다. 좌판에는 푸성귀를 차렸는데, 검붉은 고무 대야에 강아지 한 마리 앉아 있는 게 신기해, "강아지도 파시는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어데, 내 나오면 어린 게 혼자되니 업구 나왔제" 라 답하시는 할머니야말로 김해의 관광 상품이 아니고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위)새벽시장 풍경 /(아래)프리머스시네마 건물.
마침 지난주 새벽시장 특집을 꾸몄던 본지에 따르면, 83명의 상인들이 새벽 4시경부터 시작해 정오 무렵에 파장하는데, 20여 년 전 시장이 생길 때부터 김춘식(50대 초반)씨가 관리를 해왔으며, 파장 후엔 6~7명의 어르신들과 함께 청소와 뒷정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이른 새벽에는 식당업 하시는 분들이 식재료 사러 나오고, 날이 밝으면 근처 주민들이 주된 고객이 된단다. 올 7월에 경전철이 개통되면 바로 옆 부원역의 이용 때문에 근처 인도까지 좌판을 펴기는 힘들 것 같다지만, 오히려 새벽시장을 소재로 부원역의 특색을 부각시키는 도시정비의 방향을 설정할 수도 있다. 부원역의 소리시그널을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한다든 지, 난장 자체를 관광상품화하자는 논의가 진행된 적도 있느니 만큼, 새벽시장을 소재로 적자가 예상되는 경전철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새벽시장을 나와 가락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2블록 정도 지나 오른 쪽으로 흰색 5층 건물의 금강병원이 보인다. 30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건물이지만, 다시 도색한 밝은 색과 단조롭지 않은 건물 모양, 그리고 툭 트인 병원 앞 공간은 걷는 이에게 숨 한 번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1982년에 현 조은금강병원의 허명철 이사장이 금강병원을 건립할 때만 해도 김해에 이런 규모의 병원은 없었다 한다. 말하자면 서양의료의 불모지였던 김해에서 한 세대를 통해 김해시민들의 건강을 돌봐왔던 셈이다. 병원홈페이지에 소개된 허 이사장의 약력에 따르면, 의료사업과 함께 가야사 연구와 문화유적 보호 같은 문화운동과 학생을 위한 장학사업도 전개해 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 김해의 역사가 기억해야 할 인물 중에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금강병원을 나와 부산은행을 지나는데, 1978년부터 있었던 중앙파출소는 어디 갔는지 인기척 없는 붉은 벽돌건물만 휑하다. 한일이비인후과 옆 세븐일레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가락로 38번 길로 접어든다. 낙지집, 중국집, 고기집, 쌈밥집 등 온갖 종류의 음식점들을 다 지나, 약간 올라선 곳에서 분성로 336번 길과 만나는 데, 여기가 바로 김해읍성의 남문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남쪽 부경양돈농협 쪽이 둥그런 모양의 작은 광장처럼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남문 앞을 둘러쌌던 반원형 옹성(甕城)의 흔적으로 생각되는데, 농협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새벽시장 못 미쳐 '남문약국'이란 상호도 보인다. "아니, 여기가 남문 자리라면 지금의 '남문약국'은 '남문 밖 약국'이라 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혼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쨌든 이 언저리에 읍성 남문 진남문(鎭南門)이 있었으니, 지금까지 걸어 온 동네가 '남문 밖'으로 불리던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밖의 벌판과 늪지가 지금처럼 변하게 된 것은 1980~1983년까지 진행되었던 대지조성과 구획정리를 통해서였다. 이 일대의 상점가와 시장까지도 모두 바둑판같은 블록으로 구획되고 있는 것은 그런 개발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 골목길 한켠 담에 화사하게 핀 장미꽃.
발길을 되돌려 왼쪽의 풍년쌈밥과 오른쪽의 부원탕을 지나는데, 팔마철학관 앞에 크고 탐스런 장미 한 다발이 시멘트 기둥과 녹슨 철문을 타 넘고 있다. 혼란스런 간판과 전단지 자국 더덕더덕한 전신주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도 찍었다. 조금 앞의 작은 교차로에서 프렌즈마트와 투다리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 가락로 30번 길을 통해 가락로에 나선다. "왜 사진을 찍어 가냐"고 따지는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아침이라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나이트클럽 알라딘이 있다. 몇 차례 이름은 바뀌었어도, 밤이 되면 화려하게 변하는 네온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는 모양이다.
 
감초당약국을 왼쪽으로 두고 오른 쪽으로 꺾어 북진(?)을 계속하는데, 얼마 전부터 휴관 중인 것 같은 프리머스시네마가 아래 쪽에 보인다. 짧은 시간에 금소리시네마→시네럭스→프리머스김해 등 이름을 바꾸었던 영화관은 금보나 김해극장 같이 오랜 역사는 아닐지라도 여기서 가슴설레였고 추억을 만들었던 청춘남녀들의 낭만을 보듬어 주기에는 너무도 어수선한 분위기다. 왼쪽 길 건너에도 같은 분위기의 건물이 있다. 지상 8층, 객실 41개, 커피숍, 레스토랑, 나이트 등이 갖추어진 김해 유일의 1급 호텔, 김해관광호텔이 몇 년 전 폐업 후 인적이 끊겼다. 구도심 부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부원동우체국과 김해농협이 있다. 부원동우체국은 1966년부터 김해우체국이 위치했던 자리로, 1998년 김해우체국이 전하동으로 신축이전하면서 부원동우체국으로 남았던 것이다. 2003년 11월에 지금처럼 개축되었으니, 1924년에 시작된 김해 우편사무의 발상지인 셈이다.
 
▲ (위)거북 형상의 신한은행 버스정류장 /(아래)가락로와 분성로가 만나는 지점의 X자형 교차로.
몇몇의 기록과 지도를 대조해 보면 이 일대가 '남문 안'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김해지리지'에서 이병태 선생님은 김해부(金海府)의 관청인 원우(院宇)가 있었기에 부원(府院)이란 이름이 생겼다 했으나, 1820년경의 김해부내지도를 보면 이러한 설명에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부원동의 모체가 되는 부원리(府院里)는 지도에서 김해읍성의 진남문 바깥 동남쪽에 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김해부의 관청이 읍성밖에 있었을 리는 없기 때문에 여기에 연유했던 지명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이유도 없이 이런 지명이 붙었을 리는 더욱 없다. 그래서 다시 김해부내지도를 살펴보면 읍성 바깥쪽에 보다 넓은 범위를 두르고 있던 고읍성(古邑城)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부원동의 전신인 부원리가 조선시대 읍성의 바깥이긴 하지만, 이 고읍성의 안쪽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김해부에 있었던 원우에서 이 지명이 생겼다는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일제 말기의 지명이었다는 사카에정(榮町)은 그 한자처럼 일본에서 봉건영주의 성곽 아래 번창했던 상점가 마을에 곧잘 부쳐지던 이름이었다. 그런 만큼 부원동은 1980년대의 도시개발 이전에도 이미 번창하고 있었고 그 안이 '남문 안' 마을이었던 것이다. 1981년에 시로 승격하고, 1982년 2월 4일 시가지명이 정해질 때 부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1블록을 더 가면, 신한은행 앞에 묘하게 생긴 버스정류장이 있다. 곳곳에 전단지를 붙였던 자국이 더럽고, 퇴색한 도색 때문에 예쁘게 보이진 않지만, 그 기획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자기 살자고 이런 곳까지 전단지를 부치면서 상권이 죽느니 장사가 힘들다니 하는 소리는 좀 창피하다. 구도심의 부활을 걸고 머리 짜내고 땀 흘리는 사람도 있는데 치졸한 이기주의 때문에 공든 탑이 될까 걱정이다. 법적 근거는 모르겠으나, 광고주를 처벌하는 방법이라도 택해야 할 모양이다. 다만 신한은행 옆과 가락로 좌우에 도회적으로 단장된 나이키 아디다스 라푸마 같은 스포츠 등산용품의 상점들이 활기를 띠는 것이 위안자료라고나 할까? 남북의 가락로와 동서의 분성로가 만나는 교차로는 김해에서 거의 유일한 X자 횡단보도가 있는 곳이다. 평일에도 푸른 신호등이 켜지면, 휴일같이 오가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는 횡단보도가 보고 싶다.


Tip. 부원동 유적 통해 가야 '부뚜막귀신' 신앙세계 재확인 ───────

1980년대에 들어 의욕적으로 시작됐던 부원동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가야의 부뚜막귀신을 오늘의 세계로 불러냈습니다.
 
3세기 후반 경에 편찬된 '삼국지'는 "가야의 귀신 섬김이 신라와 달랐는데, 가야에서는 집 부뚜막을 반드시 서쪽에 만든다"고 했는데, 마침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앞선 발굴조사에서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1980년 동아대박물관은 23채의 집자리를 확인했는데, 부뚜막은 모두 서북쪽 벽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부원동유적의 집자리가 1~2세기경의 것이니까, 100~200년 후의 '삼국지'가 가야인의 부뚜막신앙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또 부원동유적의 부뚜막 근처에서는 사슴 뼈를 불로 지져 길흉을 점치던 복골(卜骨)이 출토되었고, 미니어처토기와 토제곡옥 같이 제사 관련의 유물도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4세기 동진(東晉)의 도사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는 한 해의 끝 날에 부뚜막 귀신이 천제에게 1년 간 그 집 가족의 선악을 보고하러 간다 합니다. 부원동유적에서 출토된 제사유물들은 천제에게 잘 말해 달라고 부탁했던 가야인들의 기원이 포함돼 있던 겁니다. 이후 김해의 봉황대유적에서도 이동식부뚜막이 출토되었고, 진주의 평거동유적에서는 4세기 경 가야의 고정식 부뚜막과 부뚜막 폐기의 의례가 수없이 확인되었습니다. 가야 부뚜막 신앙의 존재는 이제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다시 가야의 부뚜막 귀신은 대한해협을 건너 큐슈, 오사카, 나라 등과 독도 영유를 주장하는 시마네현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시마네현에는 '가야부뚜막신사'도 있습니다. 가야인이 처음 상륙했던 곳이 카마우라(釜浦), 곧 가마솥 포구였고, 내륙으로 타고 갔던 하천이 카라카와(韓川), 곧 가야천이었으며, 가야의 부뚜막 신을 모신 곳이 카라부뚜막신사였습니다. 그러나 가야의 정신세계와 일본열도 진출을 웅변해 주는 부원동유적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소멸되었고, 시청과 주변건물들은 더 이상 가야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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