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찹살, 고추가루, 들깨 등을 섞은 찹쌀풀을 입혀 사흘을 더 말리면 참죽부각이 완성된다. 빨간 새순이 돋는 4월 중순부터 5월까지 한달만 진행된다.
어릴 적 집에서 떨어지지 않는 밑반찬 가운데 하나가 '까죽장아찌'였다. 굳이 가죽이 아닌 '까죽'이라는 된소리로 발음해야 어울리는 것 같았다. 고추장 양념에 박아 숙성시킨 탓에 짭조름하고 달큰한 맛이 좋았다. 시원한 보리차에 밥을 말고 가죽장아찌 한 종지만 있으면 여름 한 끼 식사로 너끈했다. 향에 대한 기호가 생기기 전부터 먹어 온 음식이기에 특유의 향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조리하기 전의 가죽을 먹어본 적이 없기에, 어디까지가 고추장의 발효된 향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죽의 향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가죽의 독특한 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까죽'향이다.
 
그러다 십 년쯤 전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이 쓴 '맛따라 갈까 보다'라는 책을 통해 내가 알고 있던 '까죽'이 실제로는 참죽나무의 순이나 잎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참죽나무와 가죽나무의 생김새가 비슷해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참죽보다는 가죽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릴 적 습관대로 까죽 또는 까중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참죽나무는 어린 순이나 잎을 먹을 수 있는 반면 가죽나무는 맛과 냄새가 지독해 식용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뿌리의 속껍질을 한약재로 쓸 뿐이다.
 
▲ 신기마을의 참죽나무.
김해시 홈페이지에서는 참죽나무 부각을 지역의 특산품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나무처럼 순을 먹는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농촌에서는 가죽나무라 불리는 것이 참죽나무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들어 왔다. 높이 20m까지 자라는 나무로 우리고장에서는 논두렁, 밭두렁과 집의 경계에 많이 심었다. 또한 잎을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심기도 하였는데 참죽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부위는 어린 순과 잎이다. 4월에 빨간 새순이 돋으면 이를 뜯어다 데쳐서 무침을 해먹기도 하고 전을 부쳐먹기도 한다. 어린 순으로는 장아찌를 더 많이 만든다. 우리지역에서는 70여년 전부터 참죽 부각을 만들어 인근 부산과 대구 등지에 내다 팔았는데 90년대 들어서는 작목반을 만들어 마을 공동 사업으로 참죽 부각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이처럼 작목반을 만들어 마을 공동 사업으로 참죽 장아찌와 부각을 생산하고 있는 곳이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신기가죽자반작목반'이다. 참죽 대신 가죽이라는 명칭이 워낙 일반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작목반의 명칭조차도 가죽을 사용하고 있다. 자반은 주로 소금에 절인 생선을 말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채소류를 소금간 하여 반찬으로 쓰는 것도 자반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참죽 자반 작업은 빨간 새순이 돋는 4월 중순부터 잎이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5월까지 한달 남짓 진행된다. 4월부터 몇 차례 작목반 취재를 시도했지만 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장아찌 작업이 끝나야 부각 작업을 시작한다 했고, 부각 작업을 시작할 즈음에는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또 미뤄졌다. 결국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기마을을 방문할 수 있었다.
 
▲ 신기가죽자반작목반의 박건태 대표.
진례면 시례리에는 하촌·상촌·신기 등 세 개의 마을이 있다. 원래는 하촌과 상촌 마을이 중심이었고 이후에 신기마을이 생겼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신기(新基)'라는 명칭을 그대로 풀어 쓰면 '새터' 즉 새로 생긴 마을이다. 전답이 비교적 많은 하촌과 상촌 마을에 비해 훨씬 산자락으로 들어간 신기 마을에 이르니, 그 옛날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 들어 왔을 민초들의 고된 삶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이제는 지역의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으니, 세상 만사 새옹지마가 아닐까 싶다.
 
신기마을에 들어서니 참죽나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봄마다 어린잎을 딴 탓에 길쭉하게 뻗은 나무는 마치 야자수 마냥 끝 부분에만 잎자루가 붙어 있다. 그래서 나무에 문외한인 도시 '촌놈'의 눈에도 참죽나무는 쉽게 구분이 된다.
 
신기가죽자반작목반 박건태 대표의 집 마당에는 참죽 부각 건조가 한창이고, 작업장에서는 아주머니 네 분이 제품 포장에 여념이 없다. 건조대에서 수거해 온, 포장하기 직전의 부각부터 덥석 집어 물었다.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녹진녹진 씹힌다. 익숙한 참죽 향과 쌉싸래한 맛이 왠지 정겹게 느껴진다. 잘 말린 빨래에서 나는 햇볕 냄새도 어렴풋이 묻어 난다.
 
작업장 한 켠의 테이블에는 기름에 튀긴 부각 접시가 놓여있다. 허락도 없이 그것도 날름 집어 먹었다. 날것 그대로의 참죽 향은 약간 순화되었지만 바삭바삭한 식감과 찹쌀풀의 고소함이 곁들여지니 제법 고급스런 느낌이다. 첫 느낌부터 '예사 맛이 아니구나' 싶다. 박건태 대표는 "우리는 향이 약해서 튀긴 거는 잘 안묵습니다. 말린 것 그대로가 지 맛이지요"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향을 좇는 사람은 튀긴 것보다는 날것 그대로가 더 입에 맞을듯 싶다. 포장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작업하는 동안 쉴새 없이 부각 부스러기를 먹는다. "평생 드셨을 텐데 질리지도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이 좋은 기, 질릴 턱이 있나?"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하기야 나부터도 식탐을 주체 못해 손과 입이 분주하다. 그러고 보니 향이 강한 음식이 쉬 질릴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올 해 첫물로 나온 참죽순으로 만든 장아찌 한 접시도 내온다. 아직 풋내가 남아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 맛이 한층 깊어질 것이다. 박 대표께서 소주 한 잔을 권한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또한 취재의 일환이다. 장아찌나 부각이나 밥 반찬으로는 더할 나위 없다. 굳이 술과 궁합을 맞춰 보자면 장아찌는 막걸리, 부각은 맥주와 더 어울릴 듯싶다.
 
▲ 신기가죽자반작목반의 아주머니들이 전국으로 배송될 참죽부각을 포장하고 있다.
참죽 부각을 만드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참죽잎을 잎자루째 가마솥에 넣어 3분 가량 데친다. 여기에 밀가루풀을 살짝 발라 모양을 잡고 하루 동안 건조시킨다. 원래는 찹쌀풀을 썼지만 모양 잡기가 쉽지 않고 잘 마르지 않아 초벌은 밀가루풀을 사용한다. 초벌 건조한 것에 이번에는 찹쌀풀을 듬뿍 발라 사흘을 더 건조 시킨다. 이때 고춧가루·들깨 등을 섞어 색과 맛을 더한다. 이래저래 닷새 정도가 소요되는 작업인데 이 과정에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내리면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찹쌀풀은 수분 흡수가 빨라 마르기도 전에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품도 많이 들지만 결국엔 자연이 만드는 맛이다.
 
박건태 대표에게 언제부터 부각을 만들어 오셨냐고 물었더니 "언제부터랄끼 있습니까. 3대째 이걸 하고 있는데"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참죽은 김해에서 꽤 오래 전부터 즐겨 왔던 음식이다. 김해 토박이로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등을 집필한 박병출 선생에 따르면 "김해에는 예전부터 집집마다 참죽나무 한 두 그루씩이 있어 봄이 되면 잎을 따 나물·장아찌·부각 등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던 것이 "번거로우니까 부각은 점차 사라지고, 나무가 전봇대처럼 높이 자라니 노인네들은 딸 엄두를 못 내고"해서 지금은 작목반을 운영하는 신기마을에서만 특산품으로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 (왼)기름에 튀긴 참죽부각/ (오른)참죽 장아찌
신기가죽자반작목반은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다. 앞서 소개한 황교익 선생의 책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KBS '6시 내고향'에서 취재를 왔다. 방송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즉각적인 반응이 왔고 수요가 급증했다. 이후로도 몇 년 간격으로 방송 취재가 더 있었다고 한다. 요즘 방송에서 다루는 음식점 소개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박 대표에게 있어 '6시 내고향'에 대한 신뢰는 대단해 보였다. 아무튼 그 이후로 작목반은 도매상에 납품하는 대신 택배를 이용한 직거래로 전환했다. 주재료인 참죽을 구하기 위해 김해는 물론이고 인근 밀양 등지로 원정 구매를 다닐 정도다. 그래도 아직은 참죽 향에 익숙한 서울 등 타 지역에 거주하는 영남지역 출신 중장년층이 주요 고객이다. 전국적으로 일반화된 먹을거리가 아니기에 시장이 확대될 여지는 충분하다.
 
참죽은 독특한 향 때문에 벌레가 꾀지 않아 농약을 칠 필요가 없다. 타고난 웰빙 음식이다. 거기다 비타민과 카로틴, 칼슘과 칼륨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때문에 겨우내 몸속에 쌓였던 각종 독소를 체외로 배출시키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축 처진 기운을 돋우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게다가 지난 2009년 농촌진흥청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암세포를 억제하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죽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충북 영동 등을 시작으로 시설재배 농가가 늘고 있으며 농가 소득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은 참죽을 두고 "노력과 비용, 시간은 상당히 소요될 것으로 보이지만 복원해 볼 만한 전통음식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참죽과 관련한 오랜 전통과 그 전통의 맥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김해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해시청 홈페이지의 사진갤러리에는 1973년에 촬영된 낡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의 참죽 부각 건조 장면이다. 그 풍경을 오늘에 되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전통을 복원하고 농가 소득에도 기여할 수 있다면, 한 번쯤 도전해 봄직한 일일 것이다.


Tip. 메뉴와 연락처 ──────

신기가죽자반작목반에서는 참죽장아찌와 참죽부각을 생산해 소비자와 직거래로 판매한다.
▶참죽장아찌의 경우 2㎏에 5만 원(택배비 1천 원 별도)이고 참죽부각의 경우 2㎏에 6만 원(택배비 5천 원 별도)이다.
▶주소=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354번지,
▶연락처=055)-345-5292.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