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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酒仙)이 그리워 술잔에 달을 담다(4) 하늘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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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5.09.02 09:14
  • 호수 237
  • 12면
  • 주정이판화가(report@gimhaenews.co.kr)

산골의 달빛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가니 시근없는 장난기 발동

술잔 각도 이리저리 바꿔보다
마침내 성공 '앗싸!'

술 취해 구름 부르고  산비둘기 불러
꿈속의 신어동천 밤바다 유영

또 한밤에 잠이 깨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회색의 천장이 드러나고 서까래가 나란히 보입니다. 다시 잠을 청하며 눈을 붙여봅니다. 암막은 깜깜하지만 정신은 멀뚱합니다. 아마도 도로 잠자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거참! 늙으면 자다가도 뜬금없이 잠이 자주 깬다지만 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 이리 묻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며 젤 평온한 모태자세로 몸을 뉘어 봅니다. 그래본들 한 번 간 잠이 쉽게 올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고 누워서 눈만 감고 있기도 딱한 노릇입니다. 에이! 일단 일어나기로 마음먹고 눈을 부비며 창가로 가 커튼을 걷습니다. 지난달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와 절전할 요량으로 잠자는 시간대에는 마당의 외등을 꺼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한창이어야 할 바깥이 훤합니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보니 한밤 시간대입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달빛에 눈이 부십니다. 어제 오늘이 보름이었는가? 보름달같이 둥근달이 바깥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산골의 달은 도회지의 달보다 또렷하고 크고 가깝게 보이기도 합니다. 공기가 맑아 빛의 굴절이 덜하고 시야에 드는 잡다한 것들이 모두 어둠에 묻히고 대신 검푸른 하늘에 둥근 달만 도드라져 보여서 그런 거지 싶습니다.
 

   
 
일어나면서 버튼을 눌러 놓은 포트가 덜덜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창가로 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까는 검푸르기만 했지 텅 비어 있던 하늘에 구름 한 점이 흘러와 있습니다. 바람이 이는가? 마당의 자두나무 윗가지가 움직거리고 나도 어느 새 달빛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와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잠기가 좀 남아 있긴 해도 비몽사몽간은 아닌데 생뚱맞게도 술잔에 달을 띄웠다는 주선(酒仙)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시근 없는 장난기가 꼼지락거립니다. 그래, 도로 잠을 자기도 그렇고 이왕 생각난 김에 나도 술잔에 달을 띄우는 주선의 흉내 한번 내보자. 그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 술병과 술잔을 챙겨 나옵니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채워 달을 향해 폼 나게 쓰윽 내밀었습니다. 
 
허나 술잔에 달 띄우기는 생각과는 달리 만만하질 않습니다. 술잔을 사방으로 옮겨보고 술잔의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 보기도 합니다. 한참을 그래도 술잔 속에 달이 담기질 않습니다. 술잔에 달을 띄우자면 달과 술잔의 각도가 맞아야 될 성 싶었습니다. 술잔을 아래로 기울여보고 좌우로도 기울여봅니다. 이번에는 각도에 차이를 둬 가며 몇 차례 더 시도를 해봅니다. 그래도 애만 타고 아까운 술만 다 쏟아 잠자고 있는 잔디밭만 적시고 맙니다. 딴에는 이런저런 궁리를 해봐도 허삽니다.
 
결국 마음을 달리 먹었습니다. 그까짓 사금파리에 달을 띄우는 게 대수인가? 주선인들 정말로 한갓 사금파리 술잔에 달을 띄우며 달밤의 정취를 어찌 다 논하였을까? 마음 이야기일 테지, 라며 실패의 겸연쩍음을 애써 얼버무렸습니다.
 
그런 해프닝이 있은 지 몇 달 후 읍내에 나갔다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며 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마당 위로 얼추 수직선상에 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이때다 싶어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뭔 일인가, 하고 시답잖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할멈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얼른 술잔에 술을 채워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내밀었습니다. 아싸! 드디어 성공이었습니다. 술잔 속에 밝고 둥근 달이 떴습니다. 하늘에 하나 술잔에 하나, 두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뜨니 온 천지가 다 밝은 것 같았습니다. 신이 나 달밤에 훠이훠이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뜬금없이 잠이 깨거나 바깥에서 술 마시고 들어온 그런 날이면 술잔에 달 띄우기 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한 번 성공했다고 노상 그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술잔에 달이 뜨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됩니다. 될 때도 있고 헛방 칠 때도 있는 고진감래(?) 끝에 술잔에 달을 띄우자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 듯 하였습니다.
 
우선 술잔에 달을 띄우는 것은 정취를 즐기고자 함이니 절기로는 아무래도 가을이 좋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이왕 띄우는 달이 둥근 보름달이 좋을 터이니 날은 보름께가 좋습니다. 또 달이 뜬 위치와 술잔의 각도가 맞아야 하니 시는 달이 중천에 머무는 자정께가 합당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인들이여! 행여 월하의 음주 유희(遊戱) 생각이 날 때면 이 점을 유념하시라. 참! 술잔은 밝은 색은 안 좋고 진한 색일수록 좋습니다.
 
아무튼 술잔에 달 띄우기에 성공한 그날, 이치에 맞춰 살다가도 더러는 허튼짓을 해보는 것도 이런저런 시름을 물리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며 평상에 앉아 달이 담긴 술잔을 신나게 비웠습니다. 주선이라도 된 기분에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선 대취했습니다. 뱃속도 술잔의 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술 취하고 배부르면 잠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달빛 아래 육신을 맡기고 꿈나라로 빠졌습니다.
 
아까 흘러왔던 그 구름 한 점이 서쪽하늘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가지 말고 돌아오라는 손짓을 하였습니다. 구름이 돌아왔습니다. 은빛구름 위에 올라탑니다. 별들이 반딧불인 양 반짝반짝 깜박이며 앞장서 길을 터줍니다. 대숲에서 잠자던 산비둘기 두 마리도 날아와 양쪽에 달라붙어 날갯짓을 합니다. 구름과 별과 산비둘기와 함께 신어동천의 밤바다를 유영하며 놀았습니다.
 
짹짹거리는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어째? 마당의 평상에서 자리도 깔고 담요도 덮고 있습니다. 아마도 잠이 들자 할멈이 혀를 차면서도 나름대로 단도리를 한 모양입니다. 깨워도 안 일어나고 업어서 안으로 옮기자니 무거워 턱도 없고…. 할 수 없이 몸을 굴려서 자리를 깔고 다시 굴려서 반듯하게 눕혀 담요를 덮어 주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미안타, 해야 할 터인데 되레 안방을 쳐다보며 설마 자리 깔고 담요 덮을 때 발로 차서 굴린 건 아니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수돗가로 갑니다.
 
좁고 사방이 갇힌 세면실이 싫어 항상 바깥 수돗가에서 세수를 합니다. 추운 겨울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철제나 플래스틱 세수대야도 싫어합니다. 대신 독 뚜껑을 씁니다. 독 뚜껑에 물을 받습니다. 독 뚜껑에 하늘이 가득 담깁니다. 두 손을 오목하게 모으고 하늘을 가득 퍼서 세수를 합니다. 숙취고 부스스한 얼굴이고 뭐고 간에 단박에 아침하늘처럼 맑아집니다. 매일 하늘세수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볼일이 생길라치면 연거푸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볼일은 오전에 봐야 합니다. 그런데 안방을 들여다보니 할멈은 아직 자고 있습니다. 아침밥도 안 해 주고, 지난밤에 수선을 피운 앙갚음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지은 죄가 있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 따먹는 걸로 아침을 때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따먹을 과실 있는 가을이라 영 굶지는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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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이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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