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마을에서 태어나 글 읽는 선비들을 보고 자란 서예가 김미정(54) 씨. 그가 붓을 들고 글씨를 쓴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었다. 자라서 서예가가 돼야지, 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도 어른들처럼 살아야지, 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대청마루에 발을 내리고, 모시적삼을 입고, 붓글씨를 쓰고 공부하면서 살아야지, 라고만 원했다.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공부를 계속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예가가 돼 있었다는 김미정 씨의 다경서예연구실을 찾아가 보았다.

유년시절 유림 모습에 매료돼 동경
서예학원서 글씨 배우다 강사까지
병석에 누운 부친 옆에서 붓글씨

미술대전 수 차례 입상 초대작가로
유기·항아리 등 옛 물건 사랑


다경서예연구실은 진영읍 진영리 1607-1에 있다. 건물 2층에 원룸 3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경서예연구실이다. 3층 살림집에 함께 있던 서실 공간을 2층으로 내려 꾸민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출강을 하거나 서예대회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비울 때 말고는 김미정은 늘 서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붓글씨를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서실에서 가르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묵향이 물씬 풍긴다. 큰 방은 제자들이 와서 글을 쓰는 공간, 작은 방은 김미정이 글을 쓰는 곳이다. 창의 블라인드에는 그의 글씨가 장식돼 있다. 흰 색 블라인드를 사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품위 있고 운치 있는 블라인드이다. 얇은 녹색 모포로 덮은 큰 책상에는 붓이 가득 걸린 붓걸이와 벼루가 있다. 벽의 책꽂이에는 서예 관련 책과 도록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김미정은 1961년 경남 창원 동읍 화양리 곡목마을에서 김해김씨 사정공 김이형의 19대손으로 태어났다. 청동기~가야 시대의 유물들이 인근에 산재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좌측에 비석 군이 보인다. 예로부터 선비마을로 불려 왔다. 창원 유학의 정신적 지주라 할 눌재 김병린과 그의 제자 유당 김종하, 칠원의 중원 배문회, 대전의 육천재 안붕언이 수학했던 마을이다.

곡목마을에서 자란 김미정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는 용계서당이 있습니다. 서당에서 눌재 선생의 제를 올리지요. 그 때 인근 고을과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이 찾아 왔어요. 상투머리에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은 채 방천길을 따라 올라오던 선비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또 장관이었지요."

▲ 전통적 삶을 동경하는 김미정은 옛물건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린마음에도 그 풍경이 얼마나 좋았던지 김미정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어른이 되면 대청마루에 발을 내리고 모시적삼를 입고 붓글씨를 써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제를 주관하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유림들의 식사를 정갈하게 마련하는 어머니를 사랑하며 자랐다.

김미정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용계서당에서 붓글씨도 쓰고 공부도 했다. "눌재 선생의 손자인 집안 오라버니가 서당을 하고 있었어요. 집안의 재종형제들, 언니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붓글씨를 썼지요. 붓글씨를 쓰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늘 선비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선비 집안에서 엄격하고 단정한 가풍을 익히며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철이 일찍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저더러 양반집 맏며느리가 될 규수라고 말하곤 했지요. 그때 방학숙제로 붓글씨를 써 갔어요. 붓글씨가 너무 좋아서 두 번이나 해 갔죠. 한번은 붕우유신, 또 한 번은 유비무환을 썼어요. 서툴지만 빳빳한 달력에 글씨를 열심히 썼어요. 시골마을이라 액자나 족자를 할 수 없었어요. 달력 뒷면에는 색 마분지를 붙여 마무리를 했고요." 그의 방학숙제는 교실 안 창문과 창문 사이의 공간에 항상 걸려 있었다. 중학교 선생도 그의 글씨를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붓글씨를 좋아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건 1983년이다. 우전 이영복 선생이 연 서예학원에서 글씨를 배우다 학원 강사도 맡았다. 그러던 중 1987년 학원이 문을 닫았다. 원장이 학원을 맡아 해보라고 했다. 실력도 모자라지만, 선비가 할 일을 감히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양했다. 결국 학원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다음날 학원에서 글씨를 배우던 회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다시 학원을 열자는 것이었다. 회원들의 도움으로 창원 상남동에서 서예학원을 열 수 있었다. 학원의 이름은 아버지(김수하)의 호를 따서 운경서예학원이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동네의 어른이었어요. 집성촌이던 동네에 타성받이가 들어와 동네에 간혹 싸움이라도 날 경우 어느 누가 말려도 멈추지 않다가도 아버지가 지나가기만 해도 싸움이 멈출 정도로 신망이 높은 분이었어요. 힘든 사람이 있으면 늘 도와 줬고요."

김미정은 1986년 회원전을 열었을 때 전시장에 온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절모를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평소 교유하던 선비들과 함께 전시장에 오셨어요.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는 옆에서 병간호를 하면서 붓글씨를 썼어요." 1987년 그는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누운 사랑방에서 붓글씨를 썼다. 아버지는 글씨를 쓰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김미정은 서예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직도 부족하다,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95년 대구의 롱곡 조용철 선생을 찾아가 사사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다경서예연구실을 열었다. "서실을 연 뒤 공부를 계속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서예가가 되겠다, 공모전에 작품을 내 이름을 알리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로지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던 그대로, 제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하고 싶었을 뿐이죠."

▲ "서예는 저의 삶입니다" 서실에서 글씨를 쓰고 있는 김미정 서예가.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 특선 등 수 차례 입상을 했다. 그렇게 상을 받는 동안 초대작가의 조건을 갖춰 2012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가 됐다.

1988년 처음 서실을 열었으니 그가 붓글씨를 가르친 세월도 어느새 27년. 짧지 않은 세월이어서 제자들과의 인연도 깊다. "초창기에 가르쳤던 남자아이가 어른이 돼 결혼한다며 최근 어머니와 함께 찾아 왔더군요. '예장지'를 부탁하러 왔어요. 제2의 인생을 출발하는 결혼에 쓸 예장지 부탁을 받았을 때, 나를 믿는구나 싶어 기뻤어요. 다른 여제자는 예단함에 들어갈 예물을 싸는 종이에 쓸 글자를 부탁하러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글씨를 가르쳤던 것을 알아주니 진정으로 고마웠습니다."

김미정은 서예가 자신의 삶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세계를 그대로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서예가가 돼 있더라구요."

서실이 있는 건물 3층은 그의 삶의 공간이다. 그가 동경했던 삶의 세계가 궁금해 집 소개를 부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대식 공간이지만 선비나 군자의 느낌이 다가왔다. 거실 천장은 대청마루 지붕과 똑같았다. 그 지붕이 그를 이 집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곳곳에 걸린 붓글씨와 문인화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친정에서 사용하던 유기그릇, 작은 항아리, 다식판 등이 있는 작은 민속박물관 같았다.

김미정은 붓글씨가 인생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글을 쓰는가는 어떤 인생을 사는가와 같습니다. 철필로는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말을 쓸 수 있지만 붓으로는 좋은 글을 쓰게 됩니다. 좋은 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붓을 들 때의 마음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어요. 글씨를 쓸 때 진정한 나를 찾게 됩니다."  




▶김미정/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동아 국제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경남미술대전 추천작가상 수상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 MBC여성휘호대회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역임, 한국미술협회 창원지부 서예분과위원장, 창원 문화예술학교 출강, 다경 서예연구실 운영.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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