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함께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경남도 등은 최종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해시민들 중에는 가야의 고분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금관가야 등 6가야 고분군 현장을 둘러봄으로써 시민들의 가야 유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세계유산 등재 추진 운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금관가야 왕과 지배세력들의 무덤
통형동기·벽옥제석제품 동시 발굴 유일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반박 증거도 나와

 

▲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 본 대성동고분군 전경. 봉분 형태의 묘가 생기기 이전의 고분군이라 봉분이 없는 언덕 형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던 시대를 일러 삼국시대라 한다. 가야를 포함해 사국시대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교과과정 안의 역사에서는 가야사의 비중이 아직 미약하다.

이제는 가야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다. 경남도와 정부가 나서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가야사 학술회의'등을 진행하며 가야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중심에 대성동고분군이 있다.

지역 사람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대성동고분군을 '애꼬지'라 불렀다. 애꼬지란 '작은 구지봉'이라는 뜻이다. 김해 시내에 있는 대성동고분군은 정북쪽에 구지봉, 동쪽에 분산, 서쪽에 해반천, 남쪽에 봉황대를 두고 있다. 주변에는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대성동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등이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수로왕릉과 더불어 김해의 랜드마크이다. 가야문화축제를 비롯해 김해의 주요 축제들은 대성동고분군 아래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지배층과 피지배층들의 무덤군이다. 전기 가야의 중심 고분군으로 가야의 성립과 전개, 성격, 정치·사회 구조를 해명하는 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91년 1월 19일 고분군 구릉과 주변 5만 6천762㎡가 사적 제341호로 지정됐다.

높게 솟은 둥근 봉분을 생각하고 대성동고분군을 찾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른 가야 고분군과 달리 큰 봉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고분군 축조 시기가 다른 곳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봉분을 만드는 게 유행이던 시기 이전에 만들어진 고분군이라는 것이다. 대성동고분군은 가야의 여러 고분군 중 가장 축조 시기가 이른 가야 고분의 원류이다.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는 "가야고분군은 세계 민족지에서 가야의 역사를 증명하는 유일한 장소다. 세계유산의 가치를 지닌다"면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되고, 가야가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곳이 금관가야이다. 가야의 성립에 있어서 금관가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금관가야의 왕들과 지배세력의 무덤이 있는 곳이 대성동고분군"이라고 설명했다.

▲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 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1990~2014년 9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그 동안 모두 206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조사 결과 목관묘에서 목곽묘로, 다시 석곽묘·석실묘로 변모해온 금관가야 무덤의 전개 과정이 드러났다. 특히 대성동 29호분을 시작으로 하여 묘광 면적이 30㎡가 넘는 초대형 목곽묘가 발굴됐다.

가야·신라권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곽 내 순장도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됐다. 대성동 91·88호분에서 곽과 묘광 사이의 충전 공간에서도 순장자가 확인됐다. 이와 유사한 순장묘는 고령 지산동 73·75호이다. 대성동 88호분은 지산동 73호분보다 약 70~80년 이상 먼저 만들어졌다.

이영식 교수는 "2천년 전 남쪽 수릉원과 북쪽 실로암유치원 터의 낮은 쪽에서 시작한 목관묘가 1천700여 년 전 쯤 언덕 중간의 목곽묘를 거쳐 1천500년 전 정상부의 석곽묘에서 종말을 고하는 게 대성동고분군이다. 출토되는 고급유물들로 보아 가락국 '왕가의 언덕' 또는 '왕릉의 언덕'이라 불릴 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밖에 2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동복, 88호분에서는 금동제 허리띠, 91호분에서는 금동제 말갖춤새, 청동그릇, 로만글라스 편 등 중요한 유물과 유구들이 다수 출토됐다. 이는 금관가야가 중국대륙과 활발한 교류를 해 온 역사를 입증해 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대륙계 유물들이 4세기 대에 대거 출토된 곳은 대성동고분군이 유일하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일본과의 교류를 설명해 주는 파형동기, 통형동기, 벽옥제석제품, 동촉 등 왜계 유물도 꾸준히 출토되고 있다. 이 중 파형동기는 대성동고분군에서만 확인됐다. 통형동기와 벽옥제 석제품이 함께 출토된 경우도 대성동고분군 외에는 없다. 

대성동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지배집단인 대성동 세력이 중국대륙 및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입증해 준다. 대형 목곽묘 등 발굴된 무덤과 출토된 유물들은 4세기와 그 전후 시기의 아라가야, 대가야는 물론이고 신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전기 가야제국의 중심국이 금관가야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대성동고분군이다. 

이영식 교수는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은 금관가야가 동아시아계의 교류, 즉 선진 중국 문명과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일본의 국가형성과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런 점에서 대성동고분군은 가야의 우수한 문화와 역사를 말해주는 유산인 것이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 대성동고분군 안내판.


2012년 대성동고분군 7차 발굴조사에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그해 8월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영남·큐슈 고고학회 합동 고고학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 학자 50여 명은 대성동고분군 조사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충격적이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고고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츠데 히로시 오사카대학 명예교수는 "김해에서 대단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통형동기는 가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게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봉분은 없지만 금관가야의 역사적 증거를 품고 있는 애꼬지 언덕, 대성동고분군은 김해가 도시화되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 왔다. 그리고 그 고분군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나무 두 그루. 팽나무와 느릅나무는 이 언덕의 수호신이다. 이 풍경은 김해사람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정겹다.

고분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 고분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쩌면 금관가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오르면 마치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시내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지면서 고요해진다. 마치 금관가야의 왕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 하다. "가야인의 후손들이여 어서 오라. 이 곳에서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보며, 미래를 내다보라"고.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이 기사 취재 및 보도는 경남도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이뤄졌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