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
이윤택 지음
도요/250쪽
1만 3천 원

세종 때 시대적인 상황 이야기로 재미
이천·조말생 등 인물 번갈아가며 진술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의 기록이다.
 
안여는 임금이 타는 가마로, 바퀴가 달린 수레 모양이다.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니 장영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시인,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윤택의 장편소설 <궁리>에서 장영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수레를 만드는 철공이 아닌 과학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수레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소. 저를 왜 궁궐 서까래를 고치고, 말안장이나 갈고, 수레나 만드는 곳에 처박아 두셨소."
 
이윤택은 이 책에서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은 어떤 인간이었으며, 왜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천민 과학자 장영실이 역사에서 사라진 과정을 재구성한다.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해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으며,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와 자격루를 우리 민족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저자인 이윤택과 양맹준 전 부산박물관 관장의 '주해를 대신하는 방담'이 수록돼 있다. 세종과 장영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 어떤 대목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양맹준 전 관장은 장영실을 '호모 파베르(Homa Faber·공작하는 인간)'라 불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장영실은 타고난 공작하는 인간이야. 별스런 사전 지식 없이 어떤 물체라도 한 번 척 보면 물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해 내고 다 만들어버리지. 심지어 물체의 허점까지 파악해 더 버전업된 물체로 재생산해 내기도 해." 그는 덧붙여 장영실이 활동했던 당시 명나라의 반응도 전한다. "바로 이런 장영실의 천재적인 모방과 재조립 능력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지. 중국 천체기구를 그대로 베껴 만들면서 더 발전된 단계로 재창조해 냈거든. 그래서 중국에서 장영실을 잡아들이려고 난리가 났다지. 세종에게는 장영실의 존재야말로 자신의 국부론을 실현하는 마이더스의 손이었어."
 

소설을 쓴 이윤택이 분석한 장영실은 이렇다. "1410년 경 왜구 토벌대장 이천은 부산 바닷가에서 말귀를 잘 알아듣고 타고난 손재주를 지닌 동래현 소속 청년 노비 한 놈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 궁궐 기술자 양성소에 집어넣어. (중략) 세종은 온각 인문학을 통독하면서 제왕학을 익히고, 장영실은 공작술을 익히지. 그러나 그 둘의 삶의 목표는 같았어.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이란 역사적 운명이었지."
 
장영실의 과학자적 업적과 그가 만든 물건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장영실이라는 한 과학자의 고뇌, 그리고 그를 견제하고 시기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인간 장영실'에 대해 말한다. 소설은 장영실, 세종, 이천, 조말생 등의 인물이 번갈아가며 진술하는 방식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 속에서 장영실의 실체는 퍼즐처럼 하나씩 맞추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윤택의 창작 뮤지컬 '궁리'(사진)의 무대도 연상된다. 이윤택의 목소리가 들리는 소설이라는 의미이다. 화자가 바뀌면서 장영실에 대해 진술하는 장면은 마치 무대의 배경과 등장인물이 계속 바뀌는 것처럼 생각된다. 무대 한쪽에는 장영실이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자신의 넋두리를 계속 읊조리면서 말이다.
 
"왜 이리 마음이 고요해질까. 나도 자신의 속내를 읽어낼 수 없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 이게 내게 주어진 팔자로구나 생각하니 현실적인 고민거리들이 다 사라지고 단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주군께서는 왜 내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을까."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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