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멜버른의 빅토리아 국립2미술관 외부 전경.
검은 백조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만약 18세기 중엽의 조선 땅에서 오늘처럼 살고 있는 당신이 받았다고 하자. '백조의 뜻이 흰 백(白)에서 나와 새(鳥)에 이르는 것이니 검은 백조라 함은 검은 새와 흰 새가 함께 있는 모순의 형국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아마도 당신은 논리적 추론을 좋아하는 인문주의자 부류일 것이다. 반면에 '백조라 부르는 새는 고니, 고니의 깃털은 흰빛이다. 검은 백조라니. 검은 참새 흰 참새도 아직 보지 못했거늘!' 하는 의심이 들었다면 아마도 당신은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사고의 소유자라 할 것이다.
 
아무튼. 18세기 중엽,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1770년. 일군의 영국 함대가 지금의 호주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발 닿은 그 곳을 새로운 웨일즈라 불렀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들의 조국 대영제국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탐험과 약탈을 좋아하는 선조를 둔 후손들답게 제임스 쿡 선장을 선봉으로 호주의 동남부 일대를 샅샅이 훑어 나간 그들은 그곳에서 전혀 새로운 동물과 식물과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하나가 검은 백조 무리다. 미지의 남쪽 땅(오스트레일리아의 라틴어 뜻이다)에 검은 백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전 유럽에 알려졌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어 '검은 백조'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 Tommy McRae 1885년작 <포숨사냥>
과학적 눈으로 보면 검은 백조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호주 원주민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적어도 4억 년 전에 이미 호주 땅에 정착했다고 한다. 4억 년 전이라면 베링 해를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류라는 존재가 이동을 시작하기도 전이다. 하지만 오늘날 애버리지니라 부르는 호주의 원주민들은 호주 땅으로 들어와서 18세기 중엽 영국인과 마주칠 때까지 자신들의 조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4억 년 동안 별다른 문명적 발전이나 변화 없이 거의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영국인 일행과 조우했다. 아니 고고학적 발굴로 드러난 화살촉은 18세기엔 오히려 거꾸로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돌과 동물의 뼈에서 청동기와 철기로 옮아가는 통상의 인류문명 발달사가 믿을 수 없게도 호주 원주민들에겐 전혀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호주 역사는 아름다운 거짓말과 같다."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다.
 
▲ Lipundja 1963년작
캥거루란 이름의 어원에 얽힌 이야기 속에도 18세기 백인들과 애버리지니들과의 조우의 순간이 들어있다. 제임스 쿡 선장이 원주민에게 저 동물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원주민은 캥거루라고 말했다. 그런데 원주민의 캥거루라는 말은 '나도 모르겠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버전이 또 있다. 조금 더 세심한 디테일이 있는 버전이다. 원주민이 대답한 캥거루는 '당신의 말을 모르겠다'라는 뜻이라는 거다. 원주민이 영어를 몰랐을 거란 추론에서 보면 제법 그럴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캥거루의 어원은 원주민어로 강거루 즉, 회색 캥거루에서 파생된 단어란다. 예를 들어 질문을 받은 그 원주민은 산책길에 마주친 애완견을 그냥 개라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비글 종이라든지 요크셔테리어 종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속설로 알려진 나도 모른다는 'I don't know'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참 엉터리다. 그 땅에서 4억 년을 살아온 원주민들이 그들의 가장 친숙한 동물의 이름을 모를 리 있겠는가. 이름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몰상식이다. 아니다. 18세기 그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애버리지니들도 몰상식 속에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하등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멜버른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내는 들뜬 분위기다. 해외토픽 사진으로만 보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다. 남반구로 내려가면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눈 장식을 하는지, 북극성 대신 있다는 남십자성이 정말인지 궁금했다. 멜버른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두 가지 궁금증이 금세 풀려버렸다.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 있고 공항버스를 연결하는 시내의 역 이름이 마침 서든크로스 즉, 남십자성역이었다. 서든크로스역에서 무료 순환 노면 전차 트램을 타고 몇 정거장 가면 멜버른 시내의 번화가 입구에 위치한 플린더스역이다. 플린더스역 건물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듯 고풍스런 모습이다. 그리고 길을 건너면 나란히 야라강을 굽어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롭고도 파격적인 건물들이 위용을 보인다. 호주 영상 센터를 지나 먼 왼편이 이안포터센터라 부르는 국립미술관의 오스트레일리아 분관이다.
 
이민자들이 몰려오고부터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은 황무지로 쫓겨났다. 오늘날 그들이 사막지대에 사는 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긴 세월에 걸쳐 수렵 채취 생활에 익숙한 그들은 열악한 자연에서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거친 땅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사냥을 하고, 식물의 잎과 열매에서 양식을 채취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4억 년 동안. 그들의 부모 세대가 그래 왔던 것처럼.
 
▲ Rover Thomas 1989년작
미술관 건물 내부로 들어간다. 중앙 로비는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하늘까지 트여있다. 상점과 커피숍이 있는 1층을 지나 전시실이 있는 왼편의 2층으로 올라간다. 매표소가 없다. 영국의 공공미술관이 그러하듯 영연방인 호주의 공공미술관도 역시 무료다. 호주 최초의 공공미술관이라는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의 전시실은 호주 땅에서 4억 년 전부터 살아왔던 원주민 애버리지니의 미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애버리지니 전시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자연에서 보고 듣고 얻은 생각과 영감을, 자연에서 얻은 나무나 천에, 자연에서 얻은 염료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그렇게 꾸민 것들이다.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았던 애버리지니의 노래이며 기도이며 신앙인 미술품 앞에서 한참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문득 멍해졌다. 그랬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소박한 애버리지니의 미술품들을 보다가, 문득 멍해졌다. 미술이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따지고 비교하는 일이 그렇게 문득 머쓱하고 아득해져 버렸다.
 
잠시 복도로 나와 창밖으로 흘러가는 야라강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길게 내쉬어본다. 멀리 저토록. 강물이 유장하다.


Tip. 도시에 활력 불어넣는 독특한 외양 ───────

▲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제1전시관 내부 모습.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GV:National gallery of Victoria)
1861년 호주 최초의 공공 미술관으로 설립된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은 생킬다 거리의 국제관과 플린더스 역 근처의 이안포터센터라 부르는 호주관으로 나뉘어 2개의 독립된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제관은 렘브란트를 비롯한 해외 작가들 작품이, 호주관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들의 현대미술을 비롯하여 호주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돼 있다. 특히 호주관이 위치한 복합문화센터는 아름다운 야라 강가에 페더레이션 광장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을 만한 공간으로 주도면밀하게 설계되었으며, 독특한 외양으로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안포터센터
·주소:Federation Square, Cnr Russell & Flinders Sts Melbourne
·개관시간:10am?5pm 월요일 휴관
·입장료:무료
·http://www.ngv.vic.gov.au/

▶애버리지니 미술(Aborigine art)
18세기 식민지 개척기에는 인구 30만 명에 약 500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부족마다 공인된 영토와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200개가 못되는 언어만 존속해 있으며, 그 대부분은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원주민의 신화와 의식은 미술, 시, 음악, 춤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신성한 물건과 부메랑 같은 무기에 신화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새겼다. 의식을 행할 때 몸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껍질과 땅과 돌 위에 신화에 관한 그림을 그리거나 새겼는데 그림 그리기와 조각은 그 자체가 의식이었다. 현재도 지역별로 전통의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들이 다수 있으며 상업적인 화랑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멜버른(Melbourne)
부산과 비슷한 인구를 가진 멜버른은 우리나라의 정반대쪽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다. 계절은 정반대며, 시차는 1시간 빠르다. 현대의 바쁜 대도시 이미지를 가진 시드니에 비해 멜버른은 역사적 건물과 어우러진 세련된 문화 도시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영식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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