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인 '부산포' 내부 벽에 그림, 사진, 글씨 등 다양한 장식품이 붙어 있다.

부산 나가면 발걸음 저절로 '부산포'행
아는 사람 없어도 술잔 나누며 이야기
우연히 만난 유현목 감독 "술값은 내가"

지역마다 문화·예술인 안식처 한두 곳
정보 교환, 동시대 예술담론 생산 요람

산골에 사는 처지여서 도시에 나갈 용무가 생겨도 그때마다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볼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나가자면 외출이 너무 잦아집니다. 그러면 우선 작업시간에 손실을 봄은 물론이고, 자주 들락날락하다 보면 마음이 산만해서 작업의 분위기가 안 잡히고 집중력도 떨어집니다. 결국엔 작업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흐지부지한 하루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용무를 한꺼번에 모아서 나갑니다. 그런 날 낮 동안 분주하게 여러 가지 일을 보고 나면 어느 새 해질녘이 되고 곧바로 땅거미가 깔리는 어스름 저녁입니다.
 
그때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그런데 왠지 발길이 머뭇거려집니다. 산골에서 도시까지 먼 길을 나왔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가 뭔가 아쉽습니다. 만나서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정담이라도 나누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이왕 나온 김에 그럴까'라는 핑계를 대며 결국 술시의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근처 생맥주가게에라도 들어가서 몇몇에게 전화를 걸고 목을 축이며 기다립니다. 화우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술자리가 벌어집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술자리는 한 두 순배로 끝나지 않고 대개 세 순배, 네 순배로 이어지고 어둑어둑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납니다. 사실 그런 끈질긴 술자리는 젊은 화우들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이 좀 든 화우들로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힘에 부칩니다. 그래도 아무도 먼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중에 집 있는 사람 아무도 없나, 집에 가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네." 이런 소리로 웃으며 끝까지 눌러 앉아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떠나 소통이 순조로운 상대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잇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마련입니다.
 
또 화우들과의 자리에서 오가는 작업에 관한 이야기는 작업에 보탬이 되는 소득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저런 연유로 화우들의 술자리는 항상 길게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선에서 은퇴하면 건강이나 챙기고 소일거리를 찾곤 합니다. 하지만 작가들은 다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동안 해 온 작업에 대한 회한이 깊어지고, 그럴 수록 그 회한을 만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립니다. 그런 만큼 작업에 대한 열정은 더 뜨거워집니다. 마음 편히 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주위에 사람이 적다고 푸념하게 됩니다. 이 점은 작가들도 마찬가지여서 세월의 두께에 비해 인맥의 폭은 매우 줄어듭니다. 개개인의 성찰의 정도나 혹은 조형적 척도에 따라 동행자가 되는가 하면, 그런 것의 간격이 느껴지면 단박에 소원한 관계로 돌아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언필칭 매정하지만 말 섞기 어려운 사람, 서로의 생각이 엇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맛이지 않습니까.
 
인접도시 부산에서 다음달 2일부터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립니다. 매년 수십 편을 예매해 놓고 어느 작품을 볼 것인지 물어오는 고마운 후배가 있습니다. 뉴 커런츠 부분의 두 편을 보겠다고 통지해 두었습니다. 영화제가 지금은 해운대로 옮겨갔습니다만 초기에는 남포동 극장가를 중심으로 열렸습니다.
 

▲ '부산포'의 인기 메뉴인 서대 구이.
당시 남포동과 인접한 중앙동에는 주점 '부산포'가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주문한 한지를 찾으러 종이전문점이 있는 근처에 간 김에 부산포에 들렀습니다. 그곳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주점 안으로 들어서니 안쪽자리에서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김사겸 씨가 반갑게 손짓을 했습니다. 김사겸 씨는 노신사 분과 청바지 차림의 건장한 청년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노신사는 고 유현목 영화감독이었습니다. 청바지청년은 누군가 했더니, 김사겸 씨가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곽 감독은 "오늘은 제가 시다바리입니다"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습니다.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유호성에게 이것과 비슷한 유명한 대사를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포는 원래 혼자 가도 아는 사람이 보이면 스스럼없이 합석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영화인들이라 대화 내용은 당연히 영화 이야기였습니다. 나중에는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화로 손꼽히는 유 감독의 대표작 '오발탄'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오발탄은 우리나라 전후문학의 수작인 이범선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입니다.
 
오발탄 영화 중에 몇 명의 상이용사가 목로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나머지 주점의 기둥에 연신 머리를 부딪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신경이 쓰인 탓인지 옆의 철제 의수를 한 상이용사가 그만 막걸리 사발을 놓치고 맙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깨진 사발 조각이 한참 부르르 떨다가 멈춥니다. 이 장면을 클로즈업 화면으로 보여 줍니다. 그 순간 제 암막에는 깨진 사발과 상이용사가 오버랩 되었습니다.
 
▲ 고 유현목 감독이 제작한 영화 '오발탄' 포스터.
오발탄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그 장면에 애가 쓰였습니다. 깨진 사발이 상이용사의 신체를 비유한 것이라면 떨림과 멈춤은 삶과 죽음의 등식으로 암시되는 장면이 아닌가. 이것은 곧 상이용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망(無望)하다는 메시지로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장면에 대한 유 감독의 연출 의도가 궁금하였습니다. 이를 물었더니 유 감독은 가타부타 직접적인 말도 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유 감독의 부인이자 화가인 박근자 선생이 와서 우리 자리뿐만 아니라 그 시간 부산포 다른 자리들의 술값까지도 다 내었습니다.
 
주점을 나와 골목길을 걷던 유 감독이 발길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오발탄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의례적인 수사만 난무하는데 오늘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나와서 기분 좋은 자리였어요. 그래서 집사람더러 자리값 좀 하라고 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무릇 작가의 작업 행위는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자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닐까. 그런 터라 작가들이 교감 가능한 어울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것입니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도 마찬가지인가 싶었습니다. 그날 유 감독과의 그런 만남은 예술인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수 있는 부산포와 같은 그런 공간이 있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시대>의 배경이 됐던 피난시절 부산 남포동의 '밀다원다방', 환도 후 서울 청진동의 '은성주막', 진해의 '흑백다방', 대구의 '맥향다방', 1970년대 부산의 포장마차 '양산박'과 골목주점 '부산포'등은 모두 한 시대 그 지역문화예술인들의 안식처였고,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나 있던 명소였습니다.
 
알다시피 서울 종로의 세시봉음악실이 통기타가수의 산실이었다면 명동의 '설파음악실'과 부산 광복동의 '고전음악실'은 지금 70~80대 음악가들이 검정 물을 들인 군복에 군화차림으로 드나들며 꿈을 키우던 곳이라 할 것입니다. 서울의 인사동 미술거리, 고흐의 작품에 나오는 프랑스 아를르의 포럼 광장 카페, 모차르트·레닌·히틀러가 드나들었고 나치 탄생의 산실로서 어둠의 세계사를 교훈으로 안고 있으며 지금은 뮌헨 관광의 필수 코스인 맥줏집 호프브로이 하우스, 미국 뉴욕 예술의 거리 '소호', 모두가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명소로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동시대의 예술담론을 생산하던 요람이었습니다.
 
문득 우리 고장 김해에도 그런 공간 한 곳, 그런 거리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패쇄적이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소망을 가져보는 것은 단지 뒤늦은 귀향자의 외로움 탓일까요, 아니면 붉게 물들고 있는 앞산을 바라보며 가을을 타는 것일까요.




김해뉴스
판화가 주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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