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명창과
사라진 소리꾼
한정영 글
이희은 그림
160쪽/1만 원

'판소리 참스승' 신재효의 숨겨진 인생
 제자 진채선 '첫 여성 명창' 등극 과정

신재효.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판소리 가사들을 여섯 마당으로 새롭게 정리한 사람. 그에 대해 알았던 전부다. 고을 이방이었던 그의 아비가 글재주 있는 아들의 스승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양반 자제들 틈에서 중인의 자식으로 온갖 모욕을 당했음을 알지 못했다. 아비의 직업을 이어받아 이방 노릇을 하며 귀동냥으로 명창들의 소리를 들어왔음을 알지 못했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신재효는 단 한 줄의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신재효는 사비를 털어 동리정사를 지었다. 소리꾼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소리꾼들은 끼니 걱정 없이 판소리를 갈고 닦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훌륭한 소리꾼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진채선이다.
 
진채선의 아비는 또랑 광대, 어미는 무당이었다. 아비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어미는 채선에게 무당이 돼라 권했다. 하지만 채선은 조선의 첫 여자 소리 광대가 되고 싶었다. 그녀에겐 소리를 제대로 가르쳐 줄 스승이 필요했다. 신분과 남녀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스승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신재효다. 그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열정적인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신재효가 진채선에게 알려준 소리꾼이 갖춰야 하는 조건이 있다.
 
첫째 인물치레다. 남에게 얼굴을 보이고 소리를 해야 하므로 용모가 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사설치레이다. 소리는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엮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득음이다. 어떤 소리이든 자유자재로 소리를 할 수 있고, 또한 가락을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 너름새다. 소리 광대는 자신이 하는 소리 내용의 참뜻을 알아 이것을 몸짓으로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 빨간 줄을 쳤다. 가슴에 새겨야 할 조건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따라서 조금의 인물치레가 필요하다. 그리고 읽어주는 일에서 정확한 발음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상황에 맞게 목소리 톤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목소리 기교가 아닌 진심을 담아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호랑이고 할머니고 귀신인 듯 읽어야 한다. 엄마를 잃은 아이의 마음으로, 친구가 미운 아이 심정으로 절절하게 읽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진이 빠지고 만다. 하지만 기분은 왠지 좋다. 콧물 눈물 찍어내며 온갖 감정에 휘둘리며 그림책 한 권을 읽고 나면 그냥 가슴 속이 시원해져서 좋다. 소리꾼이 명심해야 할 네 가지 지침이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다니! 이 책을 안 읽었으면 어쩔 뻔 했나 모르겠다.
 
진채선은 고종과 흥선대원군에게까지 인정받는 소리꾼이 되었다. 판소리의 역사가 그녀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나뉘어졌다.
 
소리는 남자만 한다는 생각, 여자 소리꾼을 기생쯤으로 취급했던 시대에 여자 소리꾼도 당당하게 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성 소리꾼들이 판소리의 주역이 될 수 있는 물꼬를 틔워주었다.
 
신재효와 진채선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여성 정치인, 고위 여성공직자, 기업의 여성 임원이나 최고 경영자의 수가 얼마나 적은지 알고 있기에 역사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읽혔다. 옛 인물과 옛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살필 수 있는 책읽기! 그래서 책이 좋다.


김해뉴스


어영수
북스타트 코리아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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