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운동장에 그림 그리던 코흘리개
부모 반대 무릅쓰고 미술대학 진학

컴퓨터 디자인 속에 묻혀가던 일상
건축조감도에 눈길 주며 새로운 변신

헬리캠기술 개발로 활동 자유 얻어
편리성 진일보 '인클루시브'로 전환
"산속 사찰 건축 언젠가 꼭 할 일"


"연필을 씹어 먹던 코흘리개 아이는 이제는 마이크를 잡고 내가 랩을 해."

병역기피 문제로 떠들썩했던 MC몽(본명 신동현)의 히트곡 '천하무적'의 가사 일부분이다. '인크루시브 디자인 연구실 론칭아트 디자인'을 찾았을 때 디자이너 임정현 씨는 MC몽의 노래 가사부터 꺼내 들었다. 그는 노래를 다음과 같이 개사했다. '막대기를 들고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던 코흘리개 아이는 이제는 마우스를 잡고 그림을 그려.' MC몽의 노래를 듣는 순간, 딱 자기 이야기 같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그 노래를 자주 부른다고 한다.

론칭 아트는 이미 건축설계로 작업한 건축디자인을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켜 나가는 디자인 작업이다. 그의 작업실은 삼정동 희망나누미 클럽 한켠에 있다.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인물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웹툰이라도 시도해볼까 하고요"

▲ 지난해 김해예총에서 열린 인클루시브 디자인 건축물 전시회.

대부분 사람들에게 유년의 기억은 비슷하다. 하지만 막대기를 잡고 그림을 그리던 임정현의 유년은 조금 남달랐다. 그는 그림을 언제부터 그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부모는 "아주 어렸을 적 그림만 보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하루 종일 우두커니 서서 보는 걸 좋아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그것이 숯이든 흙이든, 하루 종일 집 벽지,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 열정 때문에 신동 소리도 들었다. "신동 소리에 저도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같은 화가가 될 줄 알았어요. 제 그림은 다른 그림을 베끼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죠. 그러니 신동일 리가 없었죠. 그냥 잘 베끼는 아이였던 거죠."

임정현의 지나친 그림 그리기는 새 공책을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것도 모자라 교과서마저도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다시 공책이나 교과서에 그림을 그리면 집에서 내쫓겠다는 부모의 말에 소년은 잠시 그림을 멈추었다. 그러다 소년은 아주 좋은 낙서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학교 운동장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 가득 그림을 그리고는 학교 옥상에서 바라보게 됐다.

"학교 옥상에서 바라보던 로봇 태권브이는 정말 멋졌어요. 늠름했죠. 그림만 그렸으니 당연히 학교 성적은 꽝이었죠."

임정현의 운동장 그림 그리기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됐지만 색채를 넣을 수 없어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알록달록 자신만의 색감을 입히고 싶었지만 부모는 도화지와 물감을 사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림 그리기의 열정은 꺾이질 않았다. 결국 대학 진학을 앞두고 사달이 났다. 그림을 전공하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것이었다. 부모는 "학창시절 내내 그림만 그려 공부와는 거리가 머니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그는 고집을 부렸다. 그림을 하는 삼촌의 도움으로 겨우 그림전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학교 성적이 엉망이어서 좋은 대학에는 갈 수 없었다.

임정현은 대학에서 신기한 마법 도화지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바로 컴퓨터였다. "늘 그림을 그릴 종이가 부족했어요. 그러다 컴퓨터를 만난 거죠. 종이도 필요 없고 물감도 필요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는 마법의 램프 같았죠." 컴퓨터를 손에 넣고부터 그의 그림 그리기는 자연스레 디자인으로 넘어갔다. 인쇄 홍보물, 광고 디자인에서 기업 CI나 BI까지 안 해본 디자인이 없었다. 부산 북구청 CI도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첫 직장은 인쇄소였다. 하지만 그곳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예전에 인쇄소 기획실에는 사진, 편집, 기획, 대지작업, 식자 담당으로 분업화가 되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컴퓨터 보급으로 1인 작업시대가 열린 거예요. 우후죽순처럼 디자인실이 생겨난 거죠. 그 바람에 저도 인쇄디자인실을 열었죠."

▲ 자신이 애용하는 드론을 들어보이는 임정현 디자이너.

분업을 통해 진행되던 일이 모두 한 사람에 의해서만 진행되다 보니, 일은 많아지고 자연히 전문성이 떨어졌다. 기획사의 난립으로 수입은 두 말할 것 없이 낮았다. 임정현은 어느 날 운동장에서 그림을 그리던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때처럼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가 생각한 가장 큰 그림은 건축물이었다. 그래서 건축 투시도와 3D 건축 조감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건축을 알기 위해 무료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 주면서 건축에 대해 알아갔다. 큰 그림의 겉모습도 중요하지만 건축물 내부 구조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초반에는 건축 조감도가 수채화 그림 같은 형태였죠. 실제 건축물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걸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더라고요."

그러던 중 건축물 조감도 의뢰가 처음으로 들어왔다. 작업비는 수채화 그림의 조감도를 그리는 정도였다.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문득 학교 옥상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던 느낌이 생각났다. "당장 헬기를 임대해 항공촬영을 시작했죠. 임대료가 워낙 비싸서 이왕 타고 올라간 김에 허락된 시간만큼 하늘을 날면서 모조리 사진을 찍었죠. 조감도 그림 비용이 항공 촬영비로 다 들어간 겁니다."

그렇게 작업한 조감도는 인정을 받아 일이 늘어났다. 하지만 늘어난 일만큼 헬기 임대비용도 증가했다. 결국 임정현은 조감도 작업을 그만 두고 다시 광고디자이너로 돌아갔다. 헬기를 띄울 비용이 줄어 생활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대학 시절 컴퓨터를 만났던 것처럼 새로운 마법 도화지를 발견했다.

"헬리캠이란 장비가 개발된 거예요. 지금은 드론이 보급화 되기 시작했고…. 아! 이젠 헬기를 안 띄워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광고디자인을 접고 다시 3D 조감도에 뛰어들었습니다."    

임정현은 이야기를 하던 도중 헬리캠으로 촬영해 디자인한 건축물을 설명했다. 지금은 드론을 갖게 되면서 더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전에는 의뢰받은 작업만 했지만 드론 덕택에 자신이 짓고 싶은 도시를 미리 그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작업한 건축디자인으로 지난해에 전국 최초로 인클루시브 건축물 디자인 전시회를 김해예총갤러리에서 열었다. 지금 그는 봉황초등학교 부지를 인클루시브 건축으로 작업하고 있다.    

'인클루시브(Inclusive) 건축'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복합 건축문화 공간을 뜻한다. 행동장애를 배려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무장벽) 건축'보다 조금 더 진보한 개념의 건축문화 형태다. 경전철 역에 승강기가 설치된 게 배리어 프리 건축물의 대표적인 경우라면, 인클루시브 건축은 경전철 역마다 복합 문화공간을 모두 집어넣는 것이다. 행동의 편리성과 편안함의 측면에서 조금 더 진일보한 건축물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 인클루시브 리조트를 향한 여행이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어른들이 놀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원 스톱 쇼핑처럼 원 스톱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건축물 말입니다. 건축물 자체가 놀이가 되는 그런 집이죠. 어른들은 술 마시는 것을 빼고 나면 놀이가 없어요.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고 배우는데 아이들에게 보여줄 어른들의 놀이가 없습니다. 자연히 성인이 되면 술 마시고 노는 어른들 문화를 배우는 거죠.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타락했다고 탄식하는 우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임정현은 건축주와 자주 의견충돌을 일으킨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디자인에 접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맡았던 일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건물은 짧아도 50년은 갑니다. 50년 동안 바라볼 건축을 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아름다움을 빼는 건 말이 안 되죠."

당연히 일이 많이 없으니,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있는 사찰을 자주 찾는다. 언젠가는 꼭 잘 해보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 중간에 스케치를 했다. 어릴 적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상황이 운동장에서 커다랗게 그림을 그리던 때와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드론 비행 촬영법을 보여주겠다며 근처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론을 띄우는 그의 눈빛은 학교 옥상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 임정현
동명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재학, 인클루시브건축디자인협회연구소 런칭아트 대표, 희망나누미클럽 기획본부장, 부산 북구청 CIP 총괄디렉터 역임, LGCNS 항공제품 총괄디자인 방위사업청 40억 과제 당선.

김해뉴스 /조증윤 기자 zopd@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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