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고성 송학동 고분군
 

고차국 때 중국~일본무역 기착점 역할
금관가야에 눌려 해상로·내륙로 모두 빼앗겨

포상팔국 전쟁서 패해 100년 동안 정체
광개토대왕 남정 덕분 해상강국 명성 회복

1999년 동아대박물관 사상 첫 발굴조사
소가야 지배층 무덤 입증 옥·구슬 장신구 출토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개간 등으로 많이 훼손됐지만 원래 10여 기의 대형봉토분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봉토분은 모두 6기다. 일제의 도굴과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 온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성읍 고성여자중학교 뒤 무기산 구릉에는 눈부시게 푸른 잔디 사이로 봉긋한 봉분을 자랑하는 송학동고분군이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고성군 읍내의 풍경을 감상하며 송학동고분군 사이를 걷다 보면 '이 거대한 고분의 주인들을 누구였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성박물관 최옥선 문화해설사는 소가야와 송학동고분군에 앞서 고차국과 고차국 이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차국은 기원전 2세기까지 독립된 세력으로 존속했던 변한 12소국 중의 하나다. 고대 역사서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변진 고자미동국'으로 기록돼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고차국, '구차'로 표기돼 있다.
 
고차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마한, 변한, 진한 등 삼한시대에 고성 일대는 중국과 일본 대마도, 규슈 등을 오가는 해상무역의 기착  지점이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들이 출토된 곳은 고성읍 중심부에 있는 동외동패총이다. 1969~1971, 1974, 1995년 3차례에 걸쳐 이뤄진 동외동패총 발굴조사에서 조문청동기와 중국 양쯔강유역의 토기 등이 발굴됐다.

▲ 고성읍 무기산 구릉에 자리잡은 송학동 고분군 전경. 소가야가 해상무역 왕국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최 문화해설사는 "동외동패총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사단이다. 패총 발굴 과정에서 나온 조문청동기는 제사장이 제사를 지낼 때 목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문청동기에는 새 42마리가 새겨져 있다. 중심에는 새 2마리가 마주 보면서 태양을 이고 있다. 이는 양쯔강 유역에서 출토됐던 유물과 비슷하다. 고성이 해상무역의 기착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차국이 가졌던 해상무역권은 이후 금관가야로 넘어가게 됐다. 금관가야가 중국과 백제를 잇는 해상로와 신라와 일본을 잇는 내륙로를 모두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3세기 초 금관가야에 눌려 해상무역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게 된 고차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 존재하던 골포국, 칠포국 등이 연합해 포상팔국을 형성했다. 포상팔국은 209년 해상무역권을 뺏기 위해 금관가야에 쳐들어갔다. 패배를 거듭하던 금관가야는 신라군의 구원으로 승리하게 됐고, 전쟁에서 패한 포상팔국은 100년 간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최 문화해설사는 "삼국시대에 소가야가 성립된 이후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쇠퇴했다. 이후 금관가야의 세력이 경북 고령 대가야로 옮겨가면서 소가야는 해상무역권을 되찾았다. 소가야는 고차국 당시 해상무역국의 명성을 재현할 수 있었다. 대가야는 강을 통해, 소가야는 해상을 통해 무역을 하며 세력을 넓혀 갔다"고 설명했다.
 
소가야가 해상무역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이 송학동고분군이다. 사적 제119호인 송학동고분군에는 무기산 중심부의 1호분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나간 구릉 주변에 7기의 무덤이 있다. 고분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1~3호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송학동고분군은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굴됐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성 외에 함안, 창녕, 고령 등 가야권역 대형 고분들을 발굴하고 있었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송학동고분군 발굴은 1914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으로부터 역사교과서 편찬을 위한 사료 조사를 의뢰받은 도리이 류조에 의해 진행됐다. 도리이는 송학동고분군에서 갑옷편, 대도편, 각종 토기 등을 발굴해 갖고 갔다.
 

▲ 고성박물관의 원통형 토기.

이후 일제는 1915, 1917, 1918년 동외동패총 등의 유적을 조사했다. 1918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야츠이 세이이츠는 고성의 기월리고분군과 삼사면 산성을 조사했고, 다음해에는 고성의 대형 고분군을 조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제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고성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중단됐다. 광복 이후 1999~200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우리 학자들의 손으로 첫 발굴이 이뤄졌다.
 
최 문화해설사는 "3·1운동 덕분에 고성의 대형고분군을 지킬 수 있었다. 광복 이후 발굴은 많이 늦은 편이었다.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에 나서기 전까지 고성군민들은 송학동고분군이 소가야시대 무덤인줄 모르고 낮은 구릉이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동아대박물관의 발굴 결과 송학동고분군 1호분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1호분은 서로 구조와 시기를 달리하는 3기 이상의 원형고분이 중첩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1B호분은 횡혈식 석실 구조로 석실내부 벽면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채색고분이었다. 이런 채색고분은 일본의 규슈, 간사이지방 고분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최 문화해설사는 "1호분의 3기를 봉토한 시점은 25년씩 차이가 난다. 무덤 형태도 다르다. 가장 먼저 축조된 1A호분은 수혈식 고분이다. 두 번째 1B-1호분은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복도가 있는 구조다. 백제 무령왕릉의 무덤과 비슷한 양식이다. 이는 백제가 해상무역을 하기 위해 소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가야에 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1C호분은 1B호분에 비해 석실이 넓은 구조로 횡혈식 고분"이라고 설명했다.
 
송학동고분군이 소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임을 증명하는 것은 옥과 구슬 등으로 장식된 장신구였다.
 

▲ 고성식 토기.

최 문화해설사는 "가야 지역에서는 화려한 금장신구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신라나 백제 유적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많이 발굴됐다. 신라나 백제가 금을 좋아한 것은 북방 이민족의 영향이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 사람들은 금과 비단보다 옥과 구슬을 좋아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마한의 영향을 받아 소가야 사람들도 옥과 구슬을 좋아했다. 화려한 금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가야의 세력이 약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송학동고분군에서는 통형기대, 유공광구소호, 뚜껑접시 등 토기들도 다량 출토됐다.
 
최 문화해설사는 "송학동고분군이 조성됐던 5~6세기는 신라가 가야지역을 대상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때였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는 등 복잡한 정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면서 "송학동고분군의 고분양식과 발굴 유물 등을 통해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이었던 고성의 역사적 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다.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역사를 잘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가야를 비롯한 가야에 대해 관심을 더 갖고 찬란했던 가야의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취재는 경상남도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고성(경남)=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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