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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평야 '금빛 벼바다'는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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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5.10.28 09:23
  • 호수 245
  • 12면
  • 주정이판화가(report@gimhaenews.co.kr)

   
▲ 만장대에서 내려다 본 김해시내 전경.

가슴 시원하게 하는 최고의 만장대 전망
산에 올라 누런 벼 바라보며 낭만 젖기도

도정 물량 전국으뜸 김해 들 '곡창 중의 곡창'
문민정부 때 선암다리 너머 들판 부산 편입

발전·개발 미명 이래저래 땅만 잠식 아쉬움
동광초 이색운동회 흔적없이 사라진 추억

오랜만에 만장대에 올랐습니다. 만장대는 전망이 좋습니다. 언제나 가슴이 탁 트이게 시원합니다. 한 40년 전이던가. 지금은 고인이 된 부산일보 문화부 B 기자가 월간잡지로부터 '신택리지-김해 편' 원고 청탁을 받고서는 취재하러 가는 길에 바람도 쐬고 시골 농주도 한 사발 할 겸 동행하길 권했습니다. 제 고향이 김해인 줄 알고서 시골 농주 한 사발로 운을 떼며 길잡이를 시키려는 속셈이야 쉬이 눈치 챘지만, 고향 가는 길이어서 마다할 리 없었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앞장섰습니다.
 
그날  B 기자에게 첫 번째로 안내한 곳이 만장대였습니다. 고향 생각을 할 때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해 들이며, 만장대야말로 넓은 고향들을 자랑하기에 적합한 장소라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B 기자에게 사방 50리, 우리나라 3대 평야의 하나로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해평야를 보라며 어께를 으스대며 자랑깨나 한 걸로 기억합니다. 마침 그때가 가을이라 물결처럼 넘실대던 황금들판이 장관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은 IT산업이나 서비스산업이 '천하지대본'인 세상이라 할 만도 하겠으나, 어릴 적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 유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김해 들은 넓기도 널지만 가뭄을 덜 타는 수리답이어서 벼농사가 안정적이었고 수확량 또한 많았습니다. 당시 부원동 남밖다리 안쪽에 있던 김해정미소의 정부미 도정 물량이 전국 으뜸이란 말이 나돌았을만큼 김해 들은 나락이 많이 나는 곡창 중의 곡창이었습니다.
 
당시의 농사짓기는 여러 모로 힘들었습니다. 병충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뭐니 뭐니 해도 가뭄이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에야 양수기가 충분히 지원되고 물이 날 만한 곳이라면 관정을 파는가 하면 급한대로 소방차까지 동원해 가뭄 극복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그런저런 대비책 하나 없이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가슴만 졸일 뿐이었지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뭄이 계속되면 군수가 만장대 표구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리고 한울님에게 비를 내려주길 소망하는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김해 출신의 미술가 김홍석이 1978년 제4회 인도 트리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습니다. 김홍석의 작품은 화폭에 바느질을 하듯 실을 한 올씩 뽑아 올린 뒤, 어머니들이 바느질을 마치면 이로 실을 끊는 방식으로 화폭 전체를 뽑아 올린 실밥으로 가득 채운 모노크롬 작품입니다. 김홍석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물결처럼 넘실대는 김해 들과 호롱불 아래에서 바느질하던 어머니들의 한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술회하였습니다.
 

   
▲ 가야 역사를 담은 분산성
김해 출신의 한글학자 눈뫼 허웅 선생은 "그 넓은 김해평야에 누런 벼가 익어 갈 때면 만장대에 올라 금빛 벼바다를 내려다 보며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어린 낭만을 적셔보기도 했다"고 썼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향 김해 들과 만장대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이렇듯 김해가 고향인 출향인들, 그 중에서도 읍내에 살았던 이들이 갖는 만장대와 김해 들에 대한 감정은 각별합니다.
 
부원동에 살았던 저도 마찬가집니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김해 들이었습니다. 봄이면 논두렁에 모여 앉아 밀쌀이를 하고, 여름에는 남밖다리 넘어 수리도량에서 멱을 감고,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덕 놀이터였기에 김해 들은 어릴 적 추억이 가득 담긴 항아리와도 같습니다.
 
그런 김해 들은 김영삼의 문민정부 때 부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실시했던 행정구역 개편 때 선암다리를 넘어 동편 들 전부와 부원 5구 쇠내 건너편의 앞들 전부가 부산에 편입되고 만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박간농장, 이 두 왜인회사가 김해 들의 주인이었습니다. 이제는 김해 들이 아니라 강서 들이 돼 버렸고, 논 주인도 대부분 외지인들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김해 들은 발전이니 개발이니 하는 미명하에 이래저래 잠식이 많이 됐습니다. 만장대의 전망은 그만하다 하겠으나, 만장대에서 보는 김해 들은 많이 쪼그라든 형세입니다. 한가지, 만장대의 표구나무는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습니다.
 
그렇게 달라진 김해 들에 대한 아쉬움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봉수대 뒤편 대원군의 휘호석을 거쳐 산성 둘레길에서 옛 김해읍내를 내려다 보니 햇빛을 받아 환하게 드러나는 공터 한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교인 동광초등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운동장을 보자 불현듯 옛날의 운동회 생각이 났습니다.
 
가을이면 어느 학교에서든 운동회를 하지만 동광초등학교의 운동회에는 전국 어느 학교에서도 없던 색다른 종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개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400m 계주와 기마전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도 함께하는 종목으로는 2인 3각 경주 정도일 것입니다. 동광초등학교 운동회의 특별한 종목이란 학생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참가 할 수 있는 '만장대 올라 갔다오기' 경기였습니다. 지금의 등산대회나 산악마라톤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탕! 출발 총소리가 울리면 참가자들은 정문을 빠져 나가는 무리와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두 무리로 나뉘어졌습니다. 이쪽 길이 빠르다, 저쪽 길이 빠르다는 식의 셈법에 따라 누가 안 시켜도 저절로 그리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온 나라의 산이 다 헐벗은 민둥산이었습니다. 분성산 역시 나무라곤 없는 민둥산이어서 운동장에서 산을 오르는 참가자들이 빤히 다 보였습니다. TV 생중계를 보듯이 참가자들이 지금은 어디쯤 올라가고 있고 누가 앞섰고 누가 꼴찌인지도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 만장대를 외롭게 지키는 표구나무.
얼마 안 있어 운동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찌감치 선두로 나선 선수가 놀랍게도 어른이 아닌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쭉 선두를 유지하였고 반환점인 만장대 표구나무를 맨 먼저 찍고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날 우승은 그 아이가 차지하였고, 운동장에 있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그날의 스타였던 그 아이는 우리 반 친구였습니다. 산성마을에 사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만장대에 갔다 오는 경기가 그 아이에게는 매일 오가는 등하교 길에 불과한 것이어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입니다. 애초에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그 아이는 입학을 늦게 해 동급생보다 나이가 두세 살 위였고 몸이 건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 풍문으로 듣자니 그 아이는 덩치에 걸맞게 직업군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만장대에서의 이런 저런 상념을 뒤로 하고 북문을 나서다 보니 그 아이가 살던 산성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가야테마파크가 어수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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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이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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