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야마무라 코지 그림
엄혜숙 옮김·그림책공작소

군국주의시대에 지킨 '생명존중'
85년 세월 흘러 그림책 재탄생

'돌 캐는 겐'이라 불렸던 아이가 있다. 광물을 채집하여 조사하는 것을 좋아하고, 곤충 관찰을 즐겨했기 때문이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 설화를 읽고 듣고 경전 공부도 하며 농림학교에 진학했다. 겐은 일찌감치 사람이 하는 일 중에 농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과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를, 스무 두 살 무렵엔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고향에 내려와 가난한 농민들이 척박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고 잘 살 수 있도록 과학 영농을 소개했다. 서른한 살 즈음엔 변두리 소나무 숲에서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어린이회'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기도 했다. 서른 일곱 폐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기꺼이 가난을 '선택'하고 농민들의 삶과 터전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 우리에겐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된 '은하철도의 밤'을 쓴 작가로 알려진 일본 문학가 미야자와 겐지의 내력이다.
 
군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탓에 작품으로 삶을 지켜내려 했던 생명 존중과 평화의 메시지는 그의 사후에야 재평가 받으며 현재까지 국민 문학급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죽기 두 해 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짐하며 수첩에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를 적었다. 그 시가 85년의 시간이 지난 2015년에 한국에서 그림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중략)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제껏 겐지의 자화상 같은 시로만 알려져 있다, 최근 일본 문학가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시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은 사이토 소지로다. 승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당시 일본에서 배척하던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고, 모함당하고, 교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부모와 의절하고 자녀도 잃었지만 묵묵히 아픈 사람을 돌보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며 '얼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지로가 켄지의 고향인 이와테현을 떠나던 날, 많은 사람이 배웅을 나왔다. 촌장과 유지, 교사와 승려, 걸인까지 섞인 무리 중 한 사람이었던 미야자와 겐지는 소지로를 보며 헌신하고 사랑하는 삶을 다시 한 번 새겼을 것이다.
 
이 책은 대학시절부터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좋아했던 민찬기 대표의 그림책공작소에서 발간됐다. 일본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미국의 시인 아더 버나드는 겐지가 죽고 시간이 흘러 저작권이 소멸된 시를 되살려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이기도 한 야마무라 고지는 스케일 있는 그림으로 텍스트만 있던 시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었다. 겐지 작품을 진작부터 우리나라에 소개해 온 번역가 엄혜숙은 단정한 글로 책을 완성시켰다.
 
무언가를 수첩에 쓰고, 옮겨 두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꺼내보려는, 되새기려는, 잊지 않으려는, 노력해보겠다는 시도이자 의지가 담긴 경건한 행위. 각자의 수첩에 언어도 필체도 다르지만 메모했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국경도 시대도 초월하여 이어진 묵직한 결과물이다.



김해뉴스
김은엽
화정글샘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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