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를 보자. 주인공 '이적요' 역을 맡은 박해일의 얼굴은 순식간에 청년에서 노인으로 변한다. 분장 덕이다. 이 분장은 영화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분장예술은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의 의미를 넘어 아직은 오지 않은 세월을 앞서 만나게 하는 독특한 예술 장르이기도 하다. 김해에서 '분장예술가'로 활동 중인 '이즈 메이크업'의 이현영 씨를 만나러 간다.

어릴 때부터 미술공부 서양화 꿈
어머니 권유로 대학은 아동미술

패션쇼 메이크업 친구 분장 소개
얼떨결에 참가한 뒤 새 길 골라

전국연극 대상 ‘파란’ 기억 남아
현대극에서 머리 분장 가장 중요

'이즈 메이크업'은 장유 삼문동 능동초등학교 앞에 있다. 이즈 메이크업의 건물은 예쁘다. 아기자기한 화분 소품들은 아이의 얼굴처럼 생기가 돈다. 윈도우에 진열된 드레스는 소녀의 꿈을 담고 있다. 이현영 씨의 작은 작업실로 들어서면서 "항상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해서 좋겠다"고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새로 만난 연극의 캐릭터를 구상 중이라던 그는 하던 일을 멈추더니 재치 있게 인사를 받는다. "그럼요. 여기가 명당입니다."
 
작업실에는 화장대 3개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화장대 위에는 각양각색의 색조화장품, 크기가 다른 솔(브러시) 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대 위에는 방금 작업을 마친 마네킹 얼굴이 서 있다. 반은 낡은 세월을 입었고, 반은 젊음을 입었다.
 

 

▲ 이현영 분장사가 새로운 인물캐릭터를 구상하고 있다.


손님을 맞는 응접상에는 다음 작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가면들이 표정을 달리한 채 놓여 있다. 소품창고용 문짝에는 그동안 작업한 배우들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진을 통해서 살펴본 그녀의 작업은 섬세하고, 회화적 창조성이 느껴진다. 분장을 잘 하려면 그림을 잘 그려야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공부했어요. 서양화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대학은 아동미술학과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원서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지금까지 배운 미술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을 봐서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림쟁이가 되어 밥을 굶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가 봐요."
 

 

▲ 분장으로 만난 배우들 사진.

이 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아이들에게 유아미술을 가르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인생이 무난하게 흘러 갈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사람의 삶이 통째 바뀌는 일이 있다. 그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1998년부터 분장을 시작했어요. 패션쇼 메이크업을 하던 친구가 있었지요. 미술을 했다는 이유로 보조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패션쇼의 뒷 무대는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잖아요? 다짜고짜 브러시와 색조 화장품을 주더니 '좀 진하게 화장한다 생각하고 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모델들이 '언니, 언니 빨리요' 하면서 찾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신없이 패션쇼를 마쳤다. 친구는 그에게 잘했다면서 메이크업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 길로 우리나라 최초의 분장학원인 '모뒤쉬'에 수강 신청을 했다. 
 
"가게를 하나 내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아동미술학원을 차리는 줄 알았나 봐요. 그런데 화장대, 고데기, 드라이기 같은 걸 본 어머니가 미용실을 개업하는 줄 알고 펄쩍 뛰었어요. 하나 뿐인 딸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냥 편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고된 일을 사서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열쇠를 뺏겨서 한 달 동안 가게에 못 나갔어요. 결국 식음을 전폐하며 설득을 하고 나서야 허락을 받았죠."
 
이 씨는 그동안의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극단 마산의 '파란'이라고 했다. '파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극이다. 2008년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때 왕의 상투와 중전의 대수머리를 인모로 직접 만들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극의 완성도를 위해서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죽어라 고생해서 만들었습니다. 근데 그걸 본 다른 극단의 분장사가 그냥 검정 마분지로 만들어도 될 것을 괜한 고생을 했다며 비웃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각자 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잖아요. 특히 예술은 다름을 인정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방식은 옳고 남의 방식은 틀렸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더군요. 디테일(세세한 점)을 중요시하는 게 저의 방식이거든요. 저도 아동미술을 했어요. 마분지로 만들어도 된다는 걸 왜 몰랐겠습니까."
 

 

▲ 그가 직접 만든 가면들.

그뿐만이 아니다. 연극 작업 과정에서 연출가와 대립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연출가는 작품 전체를 보지만, 자신은 작품의 디테일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작정 연출가의 말을 따라야 할 때,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현대극에서는 머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머리 모양에서부터 분장 작업을 시작합니다. 다음이 의상이고, 얼굴 분장은 맨 나중입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잖아요. 잘 차려입었으면서도 머리가 봉두난발이면 이상하거든요. 그래서 헤어 작업에 가장 공을 들입니다. 또 특수 분장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더 해보고 싶은 분야입니다. 특히 지구환경 변화에 따라 인간이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아주 세세하게 말이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지금부터라도 지구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분장은 연극이나 오페라 초창기에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촛불이나 석유램프 등 어두운 조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분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조명 기술이 발달한 이후부터 강렬한 무대조명이 배우의 얼굴에서 색깔을 지우고 윤곽선을 없애 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등장인물의 특징을 살려낼 수 있는 새로운 분장 재료, 기술이 필요하게 됐다. 특히 컬러TV의 등장은 분장기술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최근의 분장은 카메라의 발달 때문에 세세한 점이 한층 더 중요시되고 있다.
 

 

▲ 장유능동초 앞 이즈 메이크업 전경.

"분장 일을 시작하고부터 가장 좋은 점은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가을이 한창이었는데, 곧 세상이 겨울 분장을 하겠네요. 보세요. 잎이 떨어지잖아요. 제 말이 맞잖아요. 자연도 헤어부터 바꾸잖아요."  
 
이 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영화 '은교'의 주인공 이적요의 대사가 귓전을 때린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시인 로스케는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했다. 궁금해진다. 분장예술가로서 사람에게 세월을 미리 덧입혀 보았을 때 그의 마음에는 어떤 파문이 일까.

≫ 이현영/ 가톨릭대 아동미술학과, 창신대 미용과 졸업, 이즈 메이크업 대표, 동의과학대·김해대 출강 경력, 고신대 출강 중. 드라마 '아내의 유혹', 영화 '왕의 남자' 분장 작업 참여. 연극 '파란'(전국연극제 대상)과 '아사날엇디하릿고'(고마나루 금상), 뮤지컬 '명성황후', '유등' 외에 오페라 '라보엠', '마술피리', '투란도트' 등 분장 담당.

김해뉴스 /조증윤 기자 zopd@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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