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최갑수
예담
349쪽

함께 읽고싶은 삶·여행의 문장들
62개 소제목에 책 62권, 글 62개
작가의 시선·사진 더해 더욱 풍성

당신이 앉아 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레몽 드파르동의 책 <방랑>이 펼쳐져 있고, 턴테이블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이 낮게 깔린 허무의 감각을 두드리며 흐르고 있다.
 
당신의 프레임 안에는 고양이 등과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과 오후 다섯 시의 바다가 얌전히 멈추어 있어서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는 없겠다.
 
당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한 잔을 들고 깨진 틈에서 들어오는 빛과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무엇을 바라보려면 고독해야 해, 결국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나는 그렇게 당신을 만났다.
 
시인이자 여행 작가인 저자 최갑수는 오랫동안 여행 작가로 일하면서 이번 생이 약간은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희미한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는 모든 글들이 여행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 생과 사랑과 여행에 관한 문장들이다.
 
'어떤 날 나는, 깊은 밤 당신은, 그 계절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기분 좋은 솔 같은 음으로 조근조근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속에서 새 한 마리를 떠나보내기도 하고'(28쪽)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들과 마주하는 시간'(56쪽)을 만나기도 했다.
 
'고백하기 위해 당신 앞에 서야 했던 그 시절'(108쪽)이 생각나 두근거렸고 '당신의 이름을 오물거리는 봄의 오후'(118쪽)를 다시 불러오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192쪽) 내 마음을 들켜버렸고, 우리 인생에는 배경음악이 없다는 비극을 깨닫기도 했다. '결국 봄날의 눈송이처럼 덧없는 일'(318쪽)이지만 '모든 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믿으며 그래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는'(322쪽)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말을 멈춘 사이, 행간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 지루할 틈이 없다. 하이든, 카펜터스, 슈트라우스, 파바로티, 도밍고, 타레가…. 여행과 사랑과 음악은 얼마나 환상적인 세트인가. 
저자는 62개의 소제목에 62권의 책과 62개의 문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이 훨씬 더 많아 자괴감도 들었지만, 당신이 사랑한 문장들에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고 나의 마음을, 사랑을, 생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중)
 
나는 너무 자주 길 위에 멈춰 서 있고 조금씩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라는 후지와라 신야의 문장에서는 나무 위를 기어오르는 개미를 꾹꾹 눌러 죽인 나의 잔인함을 생각했고, 어느 날 갑자기 청춘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에서는 저만치 달아난 내 청춘의 뒷모습을 쓸쓸히 지켜봐야했다.
 
문장을 읽었다면 그 다음, 사진을 읽어야지.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여행지의 얼굴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움직이고,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스위치를 눌러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다 버렸다는 저자의 말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는 다시 돌하루방처럼 앉아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떠나올 때는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흔들지만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 낡은 숙소, 추적추적 내리던 비, 잘못시킨 메뉴, 그 모든 것을 품었던 도시들, 그게 여행이다.
 
넌더리를 내면서도 다시 가방을 챙겨 스스로를 위로하는 최상의 방법. 모든 여행이 당신에 관한 여행, 당신에 관한 적절한 비유를 찾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생은 정말 사랑이 아니면 여행일까. 나는 지금 사랑 중인지 여행 중인지 문득 당신에게 묻고 싶어진다. 






서명옥 소설가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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