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포 철길은 흑백사진 속 한 장면 같아
달빛 가온길~바투~함께길~만남길 등
달맞이언덕 능선 따라 2.2㎞ 구간 조성
오른쪽엔 철썩이는 바다… 한 폭의 그림

어둑어둑해지자 무릎 높이의 조명등
산책객 말벗인 양 따뜻하게 길 안내
어울마당 지나 달맞이고개 오르자 야경 일품

쌀쌀한 날씨 탓에 몸이 자연스레 웅크러들었다. 해가 지면 안 된다 싶어 두꺼운 외투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고개의 '문탠로드(Moontan road)'로 향했다. 문탠로드는 2008년에 해운대구청이 달맞이고개의 능선을 따라서 난 오솔길을 연결해 만든 산책로다.
 
당시 구청은 '햇볕에 살갗을 태운다'는 뜻인 '선탠(suntan)'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착안해 문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달빛에 무엇을 태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달빛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문탠로드라는 이름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달을 맞으러 간다는 달맞이고개나, 달빛을 받는다는 문탠로드나 이름에서 다 운치가 느껴졌다.
 
문탠로드는 미포 철길에서 시작한다. 미포육거리와 가까운 미포 철길은, 1934년에 개통해 80년 동안 사용되다 2013년에 폐선된 동해남부선의 한 부분이다. 부산시는 폐선 이후 철길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특별한 장치나 화려한 리모델링은 없었지만, 철길은 그 모습 그대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이 철길에서는 '셀카봉'을 든 20대 여성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좌우로 팔을 벌리고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가느다란 철길 위를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모두 아련한 흑백사진 속의 한 장면 같았다.
 

▲ 산책객들이 소나무 숲 사이로 난 문탠로드를 기분좋게 걷고 있다.

철길을 뒤로 한 채 안내판을 따라 달맞이고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버스가 다니고 음식점이 있는 거리를 지나는 동안 조금씩 경사도가 높아졌다. 비로소 달맞이고개에 들어섰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포 철길에서 10분 정도 올라왔을까. 문탠로드의 입구가 보였다. 초승달부터 반달, 보름달까지 여러 가지 모양의 달이 새겨진 큰 기둥 옆에는 문탠로드로 향하는 목재 데크가 이어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차도와 인도가 뒤섞여 있는 달맞이고개 앞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비밀의 화원이기라도 한 듯 촉촉한 물기를 가득 머금은 흙길의 좌우로 소나무가 줄을 이어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달빛 가온길(0.4㎞)~달빛 바투길(0.7㎞)~달빛 함께길(0.5㎞)~달빛 만남길(0.5㎞) 등 약 2.2㎞의 문탠로드가 달맞이언덕 능선을 따라 조성돼 있었다. 길 이름은 모두 순우리말이었다. 달빛 가온길은 은은한 달빛 속에서 마음을 정리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달빛 바투길은 달빛에 몸을 맡겨 새로운 나를 만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달빛 함께 길은 나와 달빛이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다. 달빛 만남길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돌아오기를 약속한다는 의미다.
 
깊은 숲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맑고 차가운 공기가 허파까지 들어오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 안의 더러운 것들이 씻겨져 내려가는 듯 몸이 한층 가벼워졌다. 아스팔트, 시멘트 바닥, 보도블럭을 밟던 발을 흙길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썩이는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여기저기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소나무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는 말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였다. 도심에서 바다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이건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혜였다.
 
오후 5시가 지나면서 어둑어둑해졌다. 문탠로드를 따라 세워져 있는 조명등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조명등은 어른 무릎 정도 높이밖에 안 되었다. 그 위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위에서 강하게 내려오는 LED가로등이 아니라, 발 옆에서 은은히 비치는 조명등은 달빛을 방해하지 않을 듯했다. 조명등은 산책객의 말벗이 돼 걷는 내내 안전하고 따뜻하게 길을 안내했다.
 
▲ 달 모양 조명등으로 장식된 산책로. 사진제공=해운대구청
문탠로드는 낮에도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지만 밤이 되면 운치가 한층 깊어진다고 한다. 파랗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 검은색으로 변하자 달빛의 진짜 매력이 나타났다. 달빛이 이토록 환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박꽃에 스미는 달빛/ 달맞이꽃에 스미는 달빛/ 그대로/ 내 마음에 스며 드네/ 밤새/ 달빛 안고/ 잠을 자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달을 닮아/ 마음도 고요하고/ 부드러워지겠네/ 햇빛 또한/ 잘 받겠네.' 이해인 수녀의 '달을 닮아'라는 시가 떠올랐다. 달빛 아래를 거니는 문탠로드에서는 딱 제격인 시였다.
 
달빛 가온길 끄트머리에는 바다 전망대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조금 돌출돼 있어서 바다를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하얀 포말처럼 아련하게 밀려왔다. 밤 바다의 낭만에 젖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벤치가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발길 따라 흙길을 걷다가 소나무를 옆에 낀 채 벤치에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 이게 문탠로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달빛 바투길까지 가는 길에는 산책객들이 쌓아 놓은 듯한 돌탑이 서 있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여기를 지나면서 돌탑에 조금씩 돌을 더한 여러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엿보였다. 산책객들도, 차가운 겨울바람도 돌탑 옆으로 조심스럽게 비켜 간 흔적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바투길 중간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공원이 있었다. 끝에서는 달맞이 어울마당이 등장했다. 이 한적한 숲 속에 어떻게 이런 무대를 숨겨놓았나 싶을 정도로 넓게 트인 정원이었다. 정원 가운데에 조성된 무대는 둥근 보름달을, 무대의 지붕은 날씬한 초승달을 닮았다. 달빛 아래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열리는 각종 공연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영국 런던의 리젠트파크에서 매년 여름마다 열리는 셰익스피어 공연이 부럽지 않을 성 싶었다.
 
어울마당은 사실 문탠로드의 기점이다. 원래 여기서부터 달맞이고개로 이어지는 달빛 함께길, 달빛 만남길로 접어들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온들 어떠리. 다시 바투길과 가온길을 거닐어도, 몇 계단 올라가 반짝이는 카페·레스토랑으로 가득찬 새로운 달맞이고개의 야경을 맛보아도 좋을 듯했다.
 
문탠로드 위 달맞이고개의 도로를 따라 이어진 카페들은 다 개성이 넘쳤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모습 또한 달맞이고개의 일부인 듯 자연스러웠다.
 
얼얼하게 빨개진 볼과 손을 녹이기 위해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들었다. 몸과 마음이 스스륵 녹아내렸다. 이해인 수녀의 시처럼 마음이 고요해지고 부드러워진 것일까. 문탠로드를 걷고 내려오는 길은 마음에 달빛을 가득 품은 듯 한층 너그러워져 있었다. -끝-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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