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시오도스는 그의 저서 <일과 나날>에서 인류의 역사를 다섯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황금시대, 은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 그는 인간이 지배하는 현재를 철의 시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음 시대? 흔히들 '플라스틱시대'라 예견하지만, '탄소시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김해 안동공단에는 이미 이 탄소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김해대로 2596번길 11 카본기술연구소 이노컴텍의 허원욱 대표가 그 사람이다.

허 대표 카 레이서 이색 이력 탓에
자동차 무게 줄이려 카본 제작 입문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체 장비 개발
전국 최고 소재 샘플 제작기술 보유
김해 수요처 기업 많아 개발 최적지
경남도· 시 발전 정책 전무 아쉬워

오전 10시. 안 그래도 좁은 안동공단의 이면도로를 차량들이 다 점령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각종 공장들이 다닥다닥 퍼즐처럼 들어 선 안동공단에서 개인연구소 이노컴텍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에서는 '근처에 목적지가 있습니다'라고 반복하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그때 바로 뒤에서 작은 쪽문이 열리더니 허원욱 대표가 "여깁니다"라며 손을 흔든다.
 

▲ 허원욱 대표가 카본으로 전기자동차 옷을 입히고 있다.

이노컴텍은 문이 내려져 있는 날이 많다. 대신 작은 쪽문을 사용한다. 카본(탄소섬유) 소재의 샘플을 제작하기 때문에 작업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창 작업 중인 작은 전기자동차가 보인다. 그 주위로 카본으로 만든 자동차 외형들이 조립을 기다리고 있다.
 
"카본으로 전기자동차의 옷을 입히는 중이었습니다. 다른 작업보다 자동차를 만지작거릴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허 대표가 웃으며 말한다. 자동차에 대한 애착은, 그의 이력이 잘 말해 준다. 허 대표는 한때 자동차 레이서였다. "레이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속도입니다. 남들보다 무조건 앞서야 이길 수 있는 경기죠."

허 대표는 어린 시절에 남들보다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했다고 한다. 속도로 승부욕을 끌어 올리는 자동차 레이서로 활동한 것은 타고난 성격을 볼 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으로 만지작거려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유형문화재를 만드는 장인들을 좋아해 쫓아 다녔다고 한다. 한때 석조각에 손을 대기도 했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때만 해도 자동차 그림은 그려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자동차경주에 한 번 참가한 차는 경기를 마치면 곧바로 새로운 엔진으로 교체합니다. 그때마다 대략 1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레이싱 차량은 모두 좋은 엔진을 장착하기 때문에 차량 성능만으로 승패를 결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승부는 레이서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자동차의 무게가 민감하게 작용합니다."
 
▲ 카본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들.
허 대표는 레이서로 활동하던 그때 자동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공부하다 처음으로 카본을 알게 됐다고 한다. 카본을 처음 접했을 때 마치 신이 만든 듯한 신비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카본에 홀딱 빠졌다. 그는 엔진 교체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레이서로 활동하면서 카본을 이용한 자동차 튜닝사업을 병행했다. 일본에서 카본을 들여와 시작한 사업이 엔고현상으로 힘들어지자 사업을 접었다. 당연히 수입원이 없으니 자동차 레이서 생활도 결혼과 동시에 접게 되었다.
 
그 때 큰 매형의 친구가 직접 카본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했다. "제대로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에서 카본 성형에 뛰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완성된 카본 제품을 수입해서 들여와 작업하던 그에게 카본 성형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해 공부를 했다. 인터넷 정보는 오류가 많았고, 그 덕분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허 대표는 수작업으로만 일하다 한계를 느꼈다. 장비 값만 수십억 원이 들어가는 첨단카본 ACM(더 가볍고 더 강한 제4세대 복합융합소재)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3억 원을 투자해 자체 장비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그의 카본 성형기술은 급진적으로 향상됐다. 신소재 박람회라 불리는 프랑스 제크전시회에 초청받는 영광도 얻었다. 그런 노력은 결국 전국 최고의 카본 소재 샘플 제작기술을 갖게 해 주었다.
 
허 대표의 사무실에는 카본으로 만든 각종 샘플들이 놓여 있다. 풀 카본으로 제작한 기타를 비롯해 각종 보호 장구에다 가면까지 있다. 연극을 전공한 기자의 눈에 띄는 건 A4 복사지 한 장 정도의 무게에 지나지 않는 가면이다. 얼굴 곡면에 그대로 달라붙기 때문에 착용감이 매우 뛰어나다. 가면을 이용한 배역 성격 창조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새로 만든 샘플이 이 가방입니다. 카본 아라미드라는 소재이지요. 영화 '스파이더 맨'에서 배우들이 착용한 의상을 만들 때도 사용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발열섬유도 카본이 기본 재료입니다." 강도가 강한 줄로만 알았던 카본이 부드러운 소재로 활용된다는 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말 다음 시대는 카본의 시대가 되겠다는 직감이 드는 순간이다.
 
카본은 탄성과 강도가 철보다 10배 강하고, 5배 가볍다. 알루미늄보다도 가볍다. 인장강도와 내열성이 상당히 강하다. 무게가 가벼울수록 좋은 낚싯대, 골프채, 테니스라켓, 양궁의 소재로 많이 사용된다. 비행기의 동체는 50%가 카본이다. 요즘 현대인의 손을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의 커버도 대부분 카본이다. 현재 제조되는 전투기의 표면은 100% 카본소재다. "셰일가스를 추출하려면 시추봉의 길이가 수 천㎞에 이릅니다. 무게도 엄청나 감당하기 힘들죠. 그래서 무게가 가벼운 카본소재로 만든 시추봉을 사용합니다. 카본은 사용되는 곳보다는 사용되지 않는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카본 기술력은 일본이 1위, 미국이 2위, 우리나라가 3위라고 한다. 3위라는 순위에 만족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게 허 대표의 설명이다. 일본과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다. 중국의 성장세도 무섭다.
 
정부에서도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북 구미와 전북 전주에 1조 원을 들여 카본 개발단지를 조성했다. 그 결과 최근 우리나라 최초로 중성능급 카본 개발에 성공했다. 허 대표는 실제 카본의 요람은 경남이라고 했다. 신소재 전문기업인 한국화이바 본사가 밀양에 있고, 전투기를 연구·개발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사천에 있다. 그러나 경남도의 카본 발전을 위한 정책방향은 전무하다며 안타까워한다. 특히 김해에는 7천 개의 기업이 있기 때문에 카본 수요처가 많아 개발의 최적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해시에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말도 덧붙인다.
 
"요즘은 탄소 소재를 이용한 예술작품들도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각도와 빛에 따라 시각적으로 3D, 5D, 6D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카본의 특성 때문입니다. 블랙은 여러 가지를 섞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카본은 출발부터가 '리얼 블랙'입니다. 카본의 리얼 블랙이 새로운 시대를 선물해 줄 것입니다. 마치 카오스에서 세상이 탄생되듯이 말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어둠이 배경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허 대표가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걸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짝반짝 빛날 것이라는 믿음이 드는 순간이다.  

≫ 허원욱/활천초, 김해중, 김해생명과학고,인제대 멀티미디어 디자인과를 졸업했다. 한때 드래그 레이싱(Drag Racing)과 자동차 튜닝에 빠졌었다. 이후 인제대 경영학 석사, 부산대 유기소재시스템공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복합소재성형전문기업인 이노컴텍(INNO COMTECH)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김해뉴스 /조증윤 기자 zopd@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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