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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도 아닌데 술 좀 줄이소!”(14) 올해는, 하찮은 다짐이나마
  • 수정 0000.00.00 00:00
  • 게재 2016.01.20 09:01
  • 호수 257
  • 11면
  • 주정이판화가(report@gimhaenews.co.kr)

지난 연말연시 이런저런 술자리로 피곤
하루 푹 쉬겠다고 맘먹은 날 또 발길
자정 넘도록 정담 나누며 실컷 마셔

집 도착해 몸 못 가누고 그만 “꽈당!”
다음날 눈 뜨니 거실에서 송장 신세
심사 틀어진 아내 “나이 생각 좀 하소”

새해 다짐이라는 걸 한 번 하지만
끊지는 못하더라도 절주해야 하는데…

예전에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였습니다. 신혼이므로 당연히 각시가 기다리는 집으로 일찍 들어가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친구들이 장가갔다고 유세 하냐, 새 각시 어디 안 간다, 라면서 놀려먹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되레 으스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 중 쥐꼬리만 한 벌이라도 하는 사람이 자신뿐이어서 대폿집에 앉아 있는 빈털터리 친구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배려를 살갑게 여기기는커녕 그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짓궂게 술자리를 늦게까지 끌며 애를 먹였습니다.
 

   
▲ 연말연시 술자리에서 건배를 하는 사람들.

물론 친구들의 속마음이 그럴 리 없었겠지만, 장가도 못 간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장가도 가고 집에서 기다리는 새 각시도 있는 데 대해 심술을 부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결혼 전과 다름없이 노상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귀가시간이 마냥 늦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한 친구가 술잔으로 그를 가리키며 "장가를 간 뒤로는 만날 각시가 기다리는 집에 빨리 못 가서 안달이더니만 요즘 며칠 사이에는 거꾸로 매일 나를 불러내네. 아무래도 각시하고 뭔 일이 있는 모양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술좌석에 앉은 다른 친구들도 "에이! 벌써부터 사랑싸움하는 거야, 뭐야? 장가 못 간 우리를 약 올리는 거야" 라며 면박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 위에 탁 놓으며 "내가 명색이 신혼인데도 네놈들 때문에 맨날 술타령하고 집에 늦게 들어가니 각시가 좋아하겠어? 그래서 며칠 전 너희들이 무슨 소릴 하든 말든 나몰라라하고 일찍 들어간 적이 있잖아. 그날 우리 각시가 좋아서 한껏 애교를 떨며 저녁상을 차려내더니 '우리 반주도 한 잔 할까요'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심 의무방어전 하는 셈치고 '그러지 뭐' 하고선 소주잔을 쨍그랑 부딪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지. 매일같이 밖에서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 많이 켕기던 터라 내친 김에 '우리 연애 시절 이후로는 이러는 게 얼마만이야. 자주 이렇게 한 잔씩 하자'는 입 발린 소리까지 했지. 분위기 좋은 술집을 순회하던 연애시절까지 회상하며 오랜만에 오붓하게 술을 마셨어.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 거야. 반주를 한 잔만 하기로 하고 시작한 술이 한 잔 두 잔 더하다 보니 너무 많이 마시게 되었고, 술 취한 눈으로 봐도 식탁 위에 놓인 빈 병이 서너 개는 되는 것 같더란 말이야. 말이 서너 병이지 두 사람이 반주로 마신 것이 그만큼이라면 많은 것 아닌가.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술병의 술이 비자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오는데 한 병이 아니라 한꺼번에 두 병이었어. 그 뒤로도 각시가 일어나고 가져오고를 몇 차례 더했지. 거기까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는 듯도 하지만 그 다음은 필름이 끊어져 모르겠어."
 
   
▲ 주정이 선생이 지인들과 술을 나누는 모습.
그러자 술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러면 둘이서 소주를 열병도 더 마셨단 말이야? 뻥치지 마라 벌써 술 취했나?"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안색을 살펴보니 '며칠 새 많이 찌든 것 같긴 하네' 하였습니다. 어쨌든 술꾼들끼리 어울려 마시는 술이면 몰라도 집에서 부인과 둘이서 반주로 시작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다는 것은 쉬이 곧이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는 완강하게 우겼고, 그날 저녁의 술 대결 결과는 그가 각시보다 먼저 곯아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처남으로부터 장인의 주량이 거의 주선(酒仙)급이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 연애시절 술집에 드나들 때 자기 각시는 한두 잔을 마실까 말까 했는데 실제 주량이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절로 혀가 내둘려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각시가 내미는 꿀물을 마신 후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들고 좌우로 윗몸을 몇 번 움직이려니 왠지 옆구리가 뻐근하더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가 찬찬히 생각해 보니 전날 저녁에 곯아떨어진 잠결에 '에구! 이 아저씨야'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옆구리를 두어 차례 차이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각시와 단 둘이 집에서 저녁을 먹을 일이 있을까 봐 미리 겁을 먹고 바깥일이 끝나도 일부러 거리를 어정거리며 각시에게 "저녁 먹고 들어갈 테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라"고 전화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주사건 이후 40여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그는 계속 술을 마셨지만, 각시가 술을 입에 대는 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사노라면 술을 마실 일이야 있기 마련이겠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구 마시며 술타령을 하는 것은 한 시절입니다. 나이가 들면 술 마시는 횟수도 줄고 양도 줄어듭니다. 물론 타고난 애주가이거나 개개인의 여타 사정에 따라 예외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1년 중 술자리가 가장 많을 때는 연말연시입니다. 노인들은 연말연시라도 기껏해야 한두 번이지 특별하게 술자리를 가질 일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 연말연시에 젊은 날 못지않다 할 만큼 이런저런 술자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힘에 부쳤습니다. 약속 하나를 취소하고 하루쯤 푹 쉬기로 하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작정하고 쉬는 날은 낮잠을 푹 자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낮잠을 한숨 푹 자고 나서 노트북을 켜서 페이스북을 열었습니다. 간혹 친지들의 근황을 접할 수 있어 좋습니다. 누군가 '낭만주막'이라는 블로그를 공유해 놓았습니다. 들어가 봤습니다. 시인 이상개 선생의 부인이 운영하는, 부산 중앙동의 '강나루' 블로그였습니다.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갤러리들이 모두 해운대쪽으로 옮겨간 후로는 갈 일이 없다 보니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습니다. 잠이 약이라던가? 푹 한숨을 자고 피로를 푼 김에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혼자 가더라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예상대로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합석을 할 만한 반가운 이들이었습니다. 그 뒤로 들어온 두어 무리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10여 명이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며 실컷 마시면서 유쾌한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도 당최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집이 산골이라는 핑계를 대고 단골 콜택시를 불렀습니다. 택시를 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기사가 깨워서 눈을 뜨니 우리 집 마당이었습니다. 제가 내리자 기사도 같이 내려서 "약주를 많이 하셨으니 부축하겠다"고 했습니다. 한사코 뿌리치면서 기사더러 밤길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말을 건네고 돌아서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넘어졌습니다. 넘어지면서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하마터면 돌계단에 이마를 부딪치는 큰 낭패를 당할 뻔하였습니다. 놀란 기사가 달려와 거실까지 부축해 주었습니다. 놀라 뛰쳐나온 할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난리 중에 마당의 강아지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짖어대 적막한 산골새벽을 분탕질 쳤습니다.
 
   
▲ 주정이 선생의 안식처.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거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맡에는 꿀물 사발이 놓여 있었습니다. 안방의 할멈이 제 잠을 깬 기척을 느끼고 "나이 생각 좀 하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심사가 단단히 틀어진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할 것 같았습니다.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사람 겉옷을 벗겨서 눕혔던 모양이었습니다. 머리맡에 물수건이 있는 걸로 봐서 뜨거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한 것도 같았습니다. 손에서 약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는 소염제라도 발라 문지르며 애먼 혀깨나 차고도 남았지 싶었습니다.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할멈이 하는 "청춘도 아닌데 술 좀 줄이소"라는 말을 올해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키지도 않는 다짐을 뭣 땜에 하냐는 생각도 들지만, 몇 십 년 동안 일 없던 새해다짐이라는 걸 올해는 한번 해 봅니다. 술 끓겠다는 것도 아닌 좀 줄이겠다는 하찮은 다짐이나마 성공해야 할 텐데…. 김해뉴스

   
 




주정이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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