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寓話) 하나. 호기심이 많았던 아이는 아무도 찾지 않는 마을 뒤 검은 숲 속의 동굴 안이 궁금했다. 마을 주민들은 떠도는 두려운 소문 때문에 동굴에 들어가는 걸 금기시했다. 그러나 아이는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이가 두려움을 억누르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동굴은 아름다운 수정이 가득 피어 있는 보물창고였다. 아이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수정의 요람 속에서 잠들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이런 수정동굴을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 동굴은 취미일 수도 있고, 특기일 수도 있다. 김경필(34·삼계동) 씨는 피규어(관절이 움직이는 인간이나 동물 형상의 모형 장난감)로 수정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잠이 든 사람이다.

거실·방안 장식장에 5천여 점 빼곡
밀랍보다 더 실물 같은 인형들 눈길
올해로 11년 째… 수집인들 사이에 유명
탈색 방지 위해 암막커튼 실제 동굴 연상

홍콩 ‘핫토이’ ‘엔터베이’서 직수입
어릴적 품은 영웅·판타지 애정 충족
스스로 ‘키덜트’라 당당히 밝혀


자작나무처럼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아파트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꼭대기층이 보일만큼 높았다.

김경필 씨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의 김경필 씨가 문을 열면서 인사를 건넸다. 거실로 들어서니 그의 키만큼이나 되는 높은 장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장식장 조명이 내리쬐는 곳에 사람을 6대 1 비율로 줄여 만든 작은 인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10년 넘게 수집한 피규어들이었다.

거실 장식장에는 특히 아끼는 애장품들을 전시해 놓았다고 했다. 거실 오른편 장식장에는 영화 '아이언맨'과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영웅 피규어들이 있었다. 왼편 장식장에는 영화 '다크나이트'의 주인공들과 배트맨이 타는 자동차인 배트카들이 시리즈별로 수집돼 있었다.

▲ 10년 동안 피규어를 수집해 온 김경필 씨가 아이언맨 피규어를 들고 서 있다.

김 씨가 한 방으로 안내했다. 거실장은 그야말로 서막에 불과했고, 이 방이야말로 김 씨의 진짜 수정동굴이었다. 방 안은 온통 피규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창문을 암막커튼으로 가려 햇빛을 차단해 놓은 방은 실제로 동굴을 연상시켰다. 빛을 차단한 것은 피규어들이 탈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밀랍인형보다 더 실물과 흡사한 인형들은 방에 들어온 낯선 사람에게 온통 시선을 집중시켰다.

김 씨는 24세 때부터 피규어와 레고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올해로 11년째다. 지금은 국내 피규어 수집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2012년에는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 씨는 어릴 적부터 한 가지 일에 집착하면 깊게 빠지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영화광, 만화광,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키덜트'를 아시는지? 키드(어린이)와 어덜트(어른)의 합성어다. 몸은 커지고 나이는 많아졌지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수집 같은 취미를 가진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키덜트라고 당당히 소개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만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소유욕이 강해 무엇이든 수집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어릴 때에는 영화 DVD와 만화책을 주로 수집했습니다. 그때도 좋아하는 것들을 모은다는 수준이 아니라 방 한쪽 벽면의 책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김 씨가 지금 피규어와 레고를 수집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영웅, 판타지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충족시키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한참 만화책을 수집하던 고등학생 때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당시 방에는 만화책들이 가득했어요. 제 방에는 언제나 친구 서너 명이 '무단취식'을 하며 상주하고 있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마치 만화방처럼 돼 버렸지요. 만화방에서 책을 빌려가듯 제 만화책도 대출과 반납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김 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입대를 하기 전까지 연극을 하기도 했다. 김해도서관 옆에 있는 가인소극장의 극단 번작이에서 활동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카렌쟈', '네거리 사람들'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무대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스태프로도 활동을 했다. "대학에서는 조소를 전공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해 영화계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조소과를 다닌 덕분에 피규어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제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었지만 한계를 느꼈어요. 전문가들이 수작업을 통해 실물과 흡사하게 만든 질 높은 피규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안목이라는 게 참 간사하더군요. 한 번 관심을 두니 자꾸만 욕심이 나는 겁니다. 더 세밀하고 현실감 있는 물건을 찾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방 안의 피규어들은 대충 보아도 수백 개는 넘어 보였다. 김 씨가 10년 동안 수집한 피규어는 5천여 개 정도라고 했다. 돈으로 따지면 2억 원 가까이 되었다. 피규어들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그가 주로 수집한 6대 1 크기의 피규어들은 30만~100만 원대다. 300만 원 이상의 가치를 가진 제품도 있다.

김 씨는 주로 홍콩에 있는 '핫토이'와 '엔터베이'라는 회사에서 직수입으로 물건을 구입한다. "처음 피규어 세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밤낮없이 인터넷을 검색해 가며 공부했지요. 국내에서 피규어를 구입해서 판매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인터넷 카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활동하다 보니 이제는 피규어 커뮤니티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피규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지만, 물량 확보 등의 문제 때문에 지금은 직수입만 하고 있습니다."

▲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들을 모델로 만든 피규어, 영화 등장인물들을 복제한 듯한 피규어들이 전시된 장식장, 영화 '어벤저스' 주역들을 6 대 1의 비율로 만든 피규어(사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핫토이'에서는 한국인 디자이너들도 여럿 일하고 있다. 그와는 인연이 이어져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면 따로 주문할 필요 없이 보내준다고 한다.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피규어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영화나 만화가 개봉하면 바로 피규어를 제작하지만, 주문량이 몰리기 일쑤다. 게다가 제품을 대부분 손으로 직접 만들기 때문에 한정판일 경우가 많다. 주문하면서 예약금을 미리 넣어 놓더라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나야 물건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지금도 1천만 원 어치 이상의 피규어를 주문해 둔 상태다.

김 씨가 가장 아끼는 애장품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온 조커 피규어다. 조커 역을 맡았던 배우 히스 레저는 자살했다. 유족이 초상권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피규어 생산은 중단됐다. 출시 때 40만 원이던 가격이 현재 100만 원대로 훌쩍 올랐다.

김 씨는 지금 레고에도 푹 빠져 있다. 방 한쪽에 돌탑처럼 쌓여 천장까지 닿은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레고는 재테크도 가능한 상품이라고 한다. 상자를 개봉하면 값어치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한쪽에 쌓아 둔다고 했다. 개봉하지 않은 레고 제품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5천만 원 가량 된다고 했다. 그는 레고를 살 때 대개 동일제품을 3~10개씩 구입한다고 했다. 한 번은 30만 원대에 산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레고가 4년 뒤 400만 원 대로 가격이 치솟은 적도 있다고 했다.

"피규어 수집은 추억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피규어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 쟁점이 됐던 상황이나 영화 속 뒷이야기 등이 응집돼 있습니다. 피규어가 만들어 준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에서 영원히 유영하고 싶습니다." 김 씨는 아이언맨 피규어를 마치 트로피처럼 들고 순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김경필/1983년 김해 출생. 고등학생 때부터 입대 전까지 극단 번작이에서 연극배우와 스태프로 활동. 현재 주점, 휴대전화가게, 부동산, 인테리어전문점 등 운영. 

김해뉴스 /강보금 인턴기자 amond@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