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도 탈, 울어도 탈이다. 김해오광대에는 어떤 탈들이 있나. 노름꾼, 어딩이, 큰이, 작은이, 영감, 할미, 영노. 이들이 김해오광대의 대표 탈이다. 탈 많은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지난해 경남무형문화재 지정 후
해반천 한 켠에 홍보관 문 열어
익살스러운 표정의 복원 탈 가득
도자기 탈·연 제작 체험도 할 수 있어

이 회장 1990년 40세 때 오광대 첫 발
정 부회장과 함께 예능보유자로
미·일 등서 지역문화사절단 역할도

해반천을 옆에 낀 채 쭉 이어져 있는 '가야의거리'는 가야문화유적지 복원사업 때 조성되었다. 이 거리는 이름에 걸맞게 봉황대유적지, 수로왕릉, 수릉원, 고분박물관, 구지봉 등 가야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국립김해박물관이 나온다. 그 앞에 김해오광대 홍보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치 지금까지 홀로서기를 해온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듯 당돌한 모습으로, 박힌 돌처럼 자리잡고 있다. 
 
김해오광대 홍보관은 지난해 10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는 김해공예품전시장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전시장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기다시피 하면서 색소폰, 통기타 등을 연주하는 라이브하우스로 잠시 이용되기도 했다. 김해오광대가 경남무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면서 이곳은 김해오광대 홍보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 이명식(왼쪽) 회장과 정용근 부회장이 김해오광대홍보관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김해오광대 탈을 촬영한 사진을 담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액자 좌측으로는 원형을 복원해 전시해 놓은 오광대 탈이 걸려 있다. 언제나 익살스런 표정으로 이 공간을 찾는 이를 반긴다. 오른쪽으로는 오광대의 유래와 여섯 과장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김해오광대보존회 이명식 회장과 정용근 부회장은 작은 오광대 탈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조 기자도 앉아서 마음에 드는 탈을 만들어 봐요." 이 회장이 말을 건넨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탈을 직접 색을 입혀 가져갈 수 있다. 재료비 5천 원만 내면 도자기 탈, 목걸이, 오광대 연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회장과 정 부회장은 지난해에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김해오광대 전승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 길만 파라는 부모 말이 딱 맞았다. 그저 좋아서 한 일인데, 예능보유자가 됐네. 팔자도 참…." 말끝을 흐리는 이 회장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어쨌든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 회장은 개인택시를 운전하다 1990년 40세 때 오광대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다. "옛날 김수로왕릉 안 나무 사이에 현수막을 걸고 맨땅에서 농악경연대회를 했어. 아침 일찍 가락에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달려가 하루 종일 구경했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배고픔도 잊은 채 경연이 끝난 저녁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갔어.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는 부모의 야단은 당연했지." 그는 성인이 되자 김해 시내로 이사를 했다. 지금은 흑백사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삼륜자동차를 몰다가 개인택시를 시작했다. 하지만 택시는 언제나 김해문화원에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정 부회장은 34세에 이 회장과 함께 오광대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손을 놓았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는 김해합동연식품이라는 두부공장에서 오전 5~10시에 배달을 했지. 배달을 마치면 쏜살같이 김해문화원으로 달려갔어. 언제나 김해문화원 앞마당에는 형님의 택시가 세워져 있었어. 하여튼 저 양반 열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김해오광대홍보관 전경.
이 회장과 정 부회장은 꽹과리를 들고 북을 두드리면 모든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무형문화재가 뭔지 아예 관심도 없었어. 그저 악을 치는 순간이 좋았고, 탈을 뒤집어쓰는 일이 마냥 좋더라고." 두 사람은 땀범벅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내리 2~3시간을 연습했다. 지금은 복개돼 사라진 호계천에 달려가 멱을 감으면 하루 연습이 끝났다고 한다. 그렇게 20년이 훌쩍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였다.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함께 한 사이다.
 
김해오광대 탈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기까지에는 몇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전국 탈놀이의 모든 탈을 수집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속에 김해오광대의 탈도 있었다. 부산 출신의 민속학자 최상수 선생은 김해오광대의 흩어진 대사를 채록해 1960년도 경남도지에 싣기도 했다.
 
고 류필현 김해문화원장은 1984년에 김해오광대의 대사를 직접 채록하기 위해 지금은 부산으로 편입된 가락마을회관을 찾아갔다. 탈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구전을 토대로 고증이 안 된  탈을 사용해 연희를 했다. 그러다 1995년 당시 김해문화원장이었던 홍관표 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김해오광대 탈 12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는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가 탈을 촬영했다. 이렇게 해서 제대로 모양을 갖춘 김해오광대 탈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 회장과 정 부회장은 오광대 덕분에 해외까지 가서 공연하는 호사도 누렸다고 한다. "우리 같은 촌놈이 외국물을 먹게 될 줄 이야." 정 보유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광대는 미국, 인도, 일본 등에서 김해 문화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국에서 공연할 때야. 거기가 강변이었거든. 사물놀이 공연을 시작하니까 젊은 여성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몰려와 우리를 지켜보더라고. 탈속에 숨긴 눈동자가 휘둥그레져서 대사를 몇 번이나 까먹었는지 몰라. 정 부회장이 실수를 많이 했지.(웃음)"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오광대의 익살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이 자연습럽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추억을 나눠먹으며 세월을 함께 지내왔다.
 
"김해오광대는 고성·통영 오광대와 달라. 보통 할미영감과장에서 할미가 죽어. 김해에서는 영감이 죽어. 노름꾼 과장의 경우 다른 곳에서는 문둥이가 등장하지만, 김해에서는 반신불수 어딩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김해오광대만의 특징이지." 이 회장이 오광대 탈을 들고 설명을 이어간다.
 
"꽹과리 배우러 가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그러더라고. 어딩이 반푼이 같은 짓하고 있다고…. 진짜 어딩이 반푼이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부모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정 부회장이 껄껄껄 웃는다.
 
▲ 김해오광대 탈로 만든 기념품.
두 사람에게 바람이 뭐냐고 물었다. "마누라한테 상을 주고 싶다"는 답이 동시에 돌아왔다. 그러면서 부산 수영야류 전수관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에서는 2.5t 트럭이 창고까지 들어갈 수 있어. 한꺼번에 소품, 의상, 악기들을 챙겨 공연장으로 바로 가더라고. 근데 우리는 세 군데를 들러야 해. 이 곳에서 탈을 챙기고, 김해민속박물관 옆 컨테이너 창고에서는 의상·소품을 꺼내고, 김해문화원에서는 악기를 챙겨야 해. 좀 큰 창고가 있었으면 좋겠어. 30년이 지난 의상이나 소품도 새로 만들고 싶고…." 이 보유자가 말끝을 맺지 못한다. 매년 김해시에 요청하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전수관을 지어 주면 좋겠지만 돈이 한 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이 죄다 시민의 세금인데 우리만 욕심을 낼 수도 없고…." 정 부회장도 말끝을 맺지 못한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건넨다.
 
"이제는 탈을 쓰고 있을 때 탈이 나인지 내가 탈인지 모르겠어."
 
두 사람 모두 탈을 쓰면 마음이 편해지고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오래된 습관에서 오는 물아일체의 느낌이 그럴까. 나비가 된 장자가 꽃밭을 노니는 호접지몽이 생각났다. 시민들 앞에서 오광대 여섯 과장을 펼치며 무대 위를 훨훨 날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될 봄날이 기다려 졌다. 취재를 마치고 김해오광대 홍보관 문을 나서는데 자꾸만 환청이 들려온다.
 
"여~어~가~암. 여엉감. 영감."  


≫ 이명식/김해문화원·내외동주민자치센터 풍물단 지도강사. 2015년 김해시문화상 수상, 경남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지정.

≫ 정용근/김해문화원·한림면주민자치센터 풍물강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학교문화예술강사. 2015년 경남무형문화재 김해오광대 예능보유자 지정. 
 
김해뉴스 /조증윤 기자 zopd@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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