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때 주로 신는 운동화 사러 부원동으로
생가가 있던 장유가도 모퉁이에 서니
옛날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쫙
예전 자갈길 신작로였던 가락로
‘빨갱이’ 토벌 미군 탱크 눈에 선해
징발된 농산물검사소에 특무대 진입
무수히 죽어간 장정들 참상도 생생

외출할 때에는 운동화를 주로 신습니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구두보다는 운동화가 편해서 좋습니다. 추운 겨울이나 운동화가 젖는 비 오는 날을 빼고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외출이래야 의복을 차려입고 가야 하는, 격식 따지는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행여 그런 자리라면 안 가니까 결례될 일도 없는지라 아무 때나 운동화를 신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계절은 못 속인다더니 입춘이 지나서 그런가, 마당에는 매화나 동백이 피었습니다. 상사화나 붓꽃의 구근도 머리를 내밀어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이제 겨울에 신던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어야겠습니다. 신발장을 살펴봅니다. 두터워서 둔해 보이거나 엷어서 아직은 철 이른 밝은 색은 몇 켤레 있으나, 지금 철에 적당한 것은 색깔이 너무 심하게 바랜 것들만 보였습니다. 마침 후배로부터 설 선물로 받은 상품권이 있어 운동화를 두어 켤레 사려고 상품권을 발행한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김해지역 매장의 위치를 찾아봤습니다. 아쉽게도 김해지역에는 매장이 없었습니다.
 

▲ 부원동을 가로지르는 가락로 전경. 지금은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지만, 과거에는 자갈길 신작로였다.

기왕에 마음 먹은 거 생돈을 주고서라도 철에 맞는 운동화를 사기로 마음먹고 시내로 나가기 위해 시간에 맞춰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김해는 외국인노동자 수가 많기로 전국 2위라던가? 그래서 그런지 주말의 마을버스 승객은 얼추 다 외국인노동자들입니다. 버스에 오르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러 명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흡사 자리 양보하기 경쟁이라도 하는 모양새였습니다. 전에는 아무리 노약자가 타도 안 그랬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항상 그렇습니다. 관련기관이나 단체에서 교육을 받아 잘 따라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버스 안 저만치에 앉아 있는 내국인 청년 두 명은 누가 타든 말든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매만지기에 열중할 뿐이었습니다. 그 같은 광경에 좋았던 기분도 잠시로 끝났습니다.
 
운동화를 대형매장에서 사기로 하고 가까운 버스정류소에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내 발길은 정했던 바와는 달리 부원동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부원동거리에 아웃도어매장이 밀집해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내가 태어나 10대 중반까지 살았던 곳이라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옮겨졌나 봅니다.
 
요즈음 경기가 엉망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애타게 기다리던 손님이 들었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갈 경우 매장 직원의 실망감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면 섣불리 매장 안으로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쇼윈도에 진열해놓은 것을 바깥에서 보고 그 중에서 마땅한 것이 있으면 그때 들어가 사기로 하였습니다.
 
이 가게 저 가게를 옮겨가며 살펴보니 어느 가게 할 것 없이 쇼윈도에는 디자인과 색상이 멋진 운동화가 넘쳐 났습니다. 하지만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이 신을 만한 수수한 것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할멈이 운동화를 알아서 사 왔습니다. 집에 전화를 해서 할멈에게 운동화를 어디서 사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메이커 제품은 색상이나 모양이 요란해서 맞는 게 없어요. 게다가 가격이 비싸서 영감 배포로는 못 사요. 재래시장에 가거나, 아니면 서상동사거리 근처에 중저가품 매장이 있어요. 거기 가서 사야할거요."
 
할멈 목소리에 "상품권을 내가 사용할까봐 잽싸기도 하네"라며 삐쭉하는 기색이 느껴졌습니다. 거참! 그것도 그러네, 싶었습니다. 일러준 대로 서상동쪽으로 가려고 쇼윈도에서 눈을 떼니 서 있던 지점이 장유가도 모퉁이였습니다. 건너편 모퉁이는 생가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 추억이 담긴 장유가도 전경.과거 농산물검사소 자리. 무수한 원혼이 묻힌 김해시청. 부원동의 한 신발가게 앞.(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대번에 옛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지금의 가락로인 예전의 그 신작로는 명색이 국도였지만 자갈길이었습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길 옆으로 돌멩이가 튕기기도 하였습니다. 매년 읍내 사람들이 부역으로 자갈을 주워 와 깔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장유가도가 읍에서 장유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이면 장유 재침산(불모산)으로 약수를 길러가는 사람들이 물통을 둘러메고 삼삼오오 지나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전쟁이 터지고는 약수 길러가는 사람 대신에 '빨갱이' 토벌하러 가는 미군 탱크가 굉음과 함께 지축을 흔들며 지나가던 광경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기억났습니다. 우리 집에서 남밖다리 쪽으로 세 번째 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양배추농사를 전문적으로 지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 아이가 읍내에서 길을 잃고 울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훌쩍이며 "우리 집 긴낭, 긴낭!"하였습니다. 긴낭은 양배추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은 사람은 대번에 아이의 집이 양배추 농사를 짓는 집인 것을 알고 데려다 주었습니다. 당시 양배추 재배는 읍내에서 그 집이 유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뇌리에 또렷이 박혀 있는 무시무시한 기억도 있습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길 건너 두 번째에 농산물검사소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농산물검사소 건물이 징발돼 특무대가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밤낮으로 남루한 핫바지 차림에 피골이 상접한 장정들이 오랏줄에 묶인 채 쉴 새 없이 끌려왔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동네사람들 모두 그곳을 무서워했습니다. 그 앞 신작로를 지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부득이하게 그 길로 가더라도 어깨에 총검을 멘 보초병을 피해 건너편 길가로 다닐 정도였습니다.
 
저도 역시 무서웠습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를 내서 특무대에 붙은 옆집에 가서 판자 울타리의 괭이 구멍을 통해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그곳 마당은 온통 국방색 천막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덮어놓은 천막은 울퉁불퉁했고, 천막 아래에는 잡혀 온 장정들이 빼곡하게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출입구 쪽에는 군인이 의자에 앉아 지키고 있다가 울퉁불퉁한 천막의 어느 한쪽이 꼼지락하면 곧바로 달러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러면 그 꼼지락하던 지점은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폭삭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누군지 알 수 없는 장정들이 무수히 죽어갔고, 그런 참상은 매일 밤새 이어졌습니다.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면 천막 밑의 주검들을 끌어내 트럭에 실어 읍내 초입의 공동묘지 남산지(지금의 시청 자리)에 갔다 버렸습니다.
 
어쩌다 볼일이라도 있어 읍내에 나간 길에 옛날 그 특무대가 있었던 자리를 지나치자면 입안에 '시레이션' 부스러기를 우물거리거나 질겅질겅 츄잉껌을 씹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던 그 망나니 군인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망각의 역사 속 그 장정들의 원혼이 어둠을 떠도는 모습이 지금도 제 망막에 선하게 비치곤 합니다.   -끝-


김해뉴스


주정이 판화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