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장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문학이야기를 하는 김원일 작가와 문학기행 독자들.
"제 작품의 대표작들은 진영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소설가 김원일 씨가 지난 19일 고향 진영을 방문했다. '부산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한 진영문학기행의 주인공인 소설가 김원일 씨와 40여명의 독자들은 대구를 거쳐 진영 여래리 금병공원에 세워진 '김원일 문학비' 앞에 함께 섰다.
 
일행이 문학비 주변에 막 도착했을 때 반가운 손님이 나타났다. 김해시의회 제경록 의원이다. 김원일 작가와 문학평론가 박홍배(부산 브니엘 예술중고등학교 교장) 씨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들에겐 제 의원이 김해시의회 부의장 시절에 문학비가 세워진 인연이 있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로
좌우익 대립 첨예했던 진영
우리의 민족사가 그러했고
내 가족사 또한 그러했으므로
자연스레 분단문학 쓰게 돼
 
지난 2005년 문학비 건립 추진 당시에 반대의견이 있었다. 김원일 작가 부친의 좌익운동 전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읽었던 제 의원이 시의회를 설득했기에, 5천만 원의 지원이 시의회를 통과했다. 문학비는 금병공원 여래못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 작가의 서재를 형상화한 '김원일 문학비'.
"김원일 선생과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제의원은 지역 현안사업 지역을 둘러보던 중 문학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서 있는 것을 보고 들렀다가 문학기행 일행을 만났다. 작가가 진영을 방문할 때면 누구를 만나든 약속 장소가 문학비 앞이란다. 이날 제 의원은 약속 없이 일행을 만나 졸지에 현장 가이드가 되었다.
 
김원일 문학비가 세워진 금병공원, 금병산과 여래못 등은 소설의 실제무대이다. 문학비는 작가의 서재 일부를 형상화 했다. 총사업비 7천만원을 들여 높이 1.7m, 가로 1.25m, 세로 1m의 크기로 만들어졌다. 조각가 정희욱 씨가 제작했다. 비의 4면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다. 탄생, 힘들게 자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의 굴곡,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이라는 뜻을 새겼다. 작가로서의 삶은 서재의 모습을 새긴 비의 앞면이다.
 
비 옆에는 문학비에 관한 사연을 새긴 석판이 있다. '김원일 선생은 해방, 분단, 전쟁으로 얼룩진 민족사적 시련을 문학혼으로 승화시켜 우리 문학사의 한 봉우리로 우뚝 솟았다. 특히 선생의 고향인 진영을 무대로 집필된 '어둠의 혼', '노을', '불의 제전' 등은 김원일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학작품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이 고장을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이에 소설의 배경인 여래못 금병공원에 선생의 문학을 기리는 돌 하나를 세워 그 자취를 남긴다. 2005. 11. 김원일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아래에는 작가의 약력이 새겨졌다.
 
비 옆에는 책 한 권이 따로 놓여졌다. 작가의 대표작 '노을'이다. 비 앞면의 서가 모습에도 책이 꽂혀져 있다. 조각가 정희욱 씨가 얼마나 실제적인 작업을 했는지, 표지와 출판사 이름도 꼼꼼하게 새겨 넣었다. '어둠의 혼'(문이당), '불의 제전'·'노을'·'마당 깊은 집'(문학과 지성사), '김원일의 피카소'(이룸), '새우리말큰사전'(삼성출판사).
 
문학비 한 쪽 면에는 '노을'의 마지막 구절도 있다. '지금 노을 진 차창 밖을 내다보는 친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일 수 있으리라. -'노을' 마지막 부분.
 
"진영은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던 곳입니다. 김해평야가 7천 정보 정도인데, 진영의 논들이 5천 정보였으니 진영이 얼마나 넒은 땅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논들을 7명의 지주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진영 사람들이나 근방의 사람들이 대부분 소작인이었고, 힘들게 살았지요. 그래서 좌익운동이 더 치열했던 겁니다. 제 아버지는 진영 대창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고, 마산상고를 졸업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농민운동 겸 좌익운동을 했습니다. 가족사가 그러했고 우리의 민족사가 그러했으니 저 역시 자연스럽게 분단문학으로 작품세계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문학비 앞에서 작가의 말이 잠깐 멈추자 독자들이 줄을 지어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위)문학비 앞에 선 김원일 작가/ (아래)작가가 어린시절을 보낸 국밥집 터
진영에서 서울로, 다시 진영으로, 또 대구로 옮겨 다닌 작가의 어린 시절은 힘들었다. 진영장터로 옮겨 작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에게 청송장터가 있었고, 저한테는 진영장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중요합니다. 진영장터는 제 소설의 주 무대였습니다. 저 참기름집, 예전에는 국밥집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진영으로 왔을 때 갈 곳이 없어서 저는 국밥집에 맡겨졌습니다. 불도 때고, 설거지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8살부터 12살까지 얹혀 살았습니다. 저 애가 여기 살아도 되나, 빨갱이 아들이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덕꾸러기로 지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의 가난, 서러움, 한 등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소설이 '노을'입니다. 당시 진영은 토박이보다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성정이 거칠었어요. 하지만, 가난을 이겨내고 자식을 공부시켜 보려는 의지가 큰 곳이었습니다. 제 어머니 역시 그랬지요. 그래서 저와 동생도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둘러선 장면이 궁금한 근처 상인들과 손님들까지 슬슬 모여들었다. "저 사람이 누고?" "유명한 글 쓰는 사람인데 진영에서 태어났단다." "몇 년 전에도 방송국하고 신문사에서 왔다 가더니 오늘 또 왔나?" 언론사에서 참기름 집을 여러 번 취재하고 간 뒤 진영장에서도 김원일 작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장터 위쪽에 생가가 있었으나, 길이 생기면서 생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원일 선생님의 중요한 작품들이 진영장터를 무대로 하는데 작은 표지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에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종일 김원일 작가를 따라다니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김지수(35·부산 중구 영주동) 씨의 말이다.
 
"진영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면 '너는 진영을 너무 나쁘게 많이 쓰더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라고 작가는 말을 잇는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그만큼 골이 깊었다는 거겠지요. 이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서 고향생각이 많이 납니다." 작가의 눈길이 장터 사람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편에 서 있던 박홍배 문학평론가는 "이제 김원일도서관을 만들어야 할 일과 진영장터에 표지석을 세워야 할 일이 남았다"고 말했다.
 
작가의 고향이며, 좌우익 대립 역사의 한 페이지였던 진영장터에 선 작가와 독자들은 막걸리에 국수 한 사발 하러 장터 안으로 들어갔다. 작가의 흰머리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은 진영장날이었다.

 

사진=김병찬 기자 KB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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