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신전>
황광우 지음
생각정원·351쪽

철학자-영웅의 화해 못할 갈등
재치있고 명철한 문장 읽는 재미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극적이다. 지금 막 격한 운동을 끝내고 나온 듯한, 웃통을 반쯤 걸친 채 침대에 앉아 있는 근육질의 노인. 소크라테스는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라고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며 죽을 사람이 산 사람들을 위로한다.
 
침대 끝에는 비탄에 젖은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다. 그의 발밑에서 두루마리가 뒹군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던 제자 플라톤이다. 다비드의 그림 속에서 노인 소크라테스는 너무 젊었고, 청년 플라톤은 너무 늙었다. 곧 생사가 뒤바뀔 사제지간의 운명은 그들의 육체도 뒤바꿔 놓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테네 시민들에게 담담하게 이별을 고했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신이 이미 정해 놓은 여행 같은 것이었다.
 
황광우의 <철학의 신전>은 시인 호메로스와 철학자 플라톤의 대결을 다룬 이야기다. 플라톤의 사상을 되짚어보고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분석해 본다. 그리고,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본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신들의 대리자를 자처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영웅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인간 대 인간, 신 대 신, 인간 대 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간에 무지막지한 그들의 창과 방패는 멈추지 않았다. 선홍색 피가 떨어지면 영웅의 목도 떨어지리라. 죽으면 끝이다.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한다. 피하지 못할 죽음이라면 명예롭게 죽으리라.
 
그리스인들에게도 죽음은 두려웠나 보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시를 배우고, 외우고, 즐겼다. 폴리스(도시국가)의 연극무대에서는 날마다 영웅의 이야기를 상연했다. 누군가 큰 소리로 호메로스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영웅들의 매력에 취했다.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싫어했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를 신봉하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플라톤에게 호메로스는 미신이었다. 스승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배를 들이켰다.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탈옥할 기회를 가졌음에도 "죽음은 직접 신을 볼 수 있는 여행"이라며 피하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주범이었다. 호메로스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플라톤도 스승과 같은 죄목으로 재판정에 설지 모른다. 플라톤으로서는 자신도 살고 스승도 살리는 강구책을 찾아야 했다.
 
아테네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철학은 호메로스의 저승에 갇힌 하얀 영혼과 같은 것이었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인간의 존재 이유였다. 철인(哲人)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건 그의 오래된 야망이었다.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시인을 추방하라. 플라톤의 저서 <국가>는 호메로스에게 죄를 묻고 있다.
 
'삶과 죽음, 영혼과 신을 둘러싼 플라톤과 호메로스의 대결' 다소 긴 소제목이 붙은 <철학의 신전>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화적 상상력과 고전에 밝은 지은이의 재치 있고 명철한 문장들이 독자의 눈을 피로하지 않게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독자들의 영혼에 신전이 지어질 것이다. 그 신전에 누가 들어 갈 것인가. 영웅인가, 아니면 철인인가. 영웅과 철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들여보낸다 하더라도 당신은 글자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방주의 주인이 될 것이니….
 
타계한 그리스신화 전문가인 이윤기 선생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아직도 유효한 신들이 아니라 우편번호도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나버린 신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나 이 신들을 만만하게 주물러서 다시 빚어낼 수 있다"고 했다. 호메로스는 호메로스답게 하데스에 갇혀 있을 것이고, 플라톤은 플라톤답게 기억을 새롭게 해주는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만하게 여겨야할 것은 어쩌면 이들인지도 모른다.

도서제공:영광도서 김해뉴스

 

 

김명훈
독서토론회 글&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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