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 10시. 누군가는 사무실에서 하루 일과의 첫 페이지를 저만치 넘기고 있을 시간이다. 다른 누군가는 어깨에 매달린 아침 잠 탓에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시간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의 출근과 등교를 후원한 뒤 늦은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카메라를 챙겨 든 다음, 부원역에서 한적한 경전철을 타고 가다 박물관역에서 내렸다. 김해문화의전당 누리홀에서 매월 두 번째 주 목요일에 열리는 '아침의 음악회'를 찾아가는 길이다.
매달 둘 째 주 목요일 누리홀에서
10년째 지역 대표하는 ‘마티네 콘서트’
1시간 짧은 공연이지만 매 회 북적
‘지휘자 박지운과 떠나는 오페라여행’
시간 관계로 해설 넣어 ‘미니 콘서트’로
공연 시작 안내 음 나오자 관객들 몰입
중창 위주의 3막 90분 무대 ‘후끈’
공연 후 브런치와 함께 감상평 이벤트
관객들 “무료했던 오전시간에 새 활력”
김해문화의전당 1층 로비.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다르다. 수백 개의 의자와 차 테이블들이 줄을 맞춰 세워져 있다. 테이블 사이를 공연기획팀 서종호 차장이 분주히 뛰어 다니고 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네요."
공연이라면 대부분 저녁에 열린다. 하지만 '아침의 음악회'는 이름 그대로 오전에 열린다. 공연팀과 스태프들은 이른 아침부터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아침의 음악회'.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마티네 콘서트다. 마티네 콘서트는 '오전'을 뜻하는 프랑스어 '마탱(matin)'에서 온 말. 오전에 열리는 공연을 가리킨다. 서종호 차장은 "클래식은 색깔을 내기 좋은 아이템이다. 적은 예산으로 기획하기에 좋다. '아침의 음악회'는 김해문화의전당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리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아침의 음악회' 진행 시간은 대개 1시간 정도. 누리홀은 360여 석의 좌석을 갖춘 소규모 공연장이다. 대공연 위주인 마루홀과 달리 관객과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연들이 펼쳐진다. 연극, 뮤지컬, 토크 콘서트 같은 공연이 주로 올라간다고 한다. '아침의 음악회' 관객은 평균 200여 명이다. 지난 2월 공연은 '지휘자 박지운과 떠나는 오페라여행-베르디 라트라비아타'였다.
누리홀 안을 둘러봤다. 관객들은 아직 입장하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무대 장비를 점검하며 진지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누리홀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무대 뒤는 공연팀의 대기실이자 분장실이다.
주인공 알프레도 역의 장진규 씨와 제르몽 역의 조현수 씨가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낮은 음성으로 농담을 주고 받았다. 공연에 앞서 긴장을 풀기 위한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페라 가수에게는 목이 악기다. 아침 공연이 있는 날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계속 수다를 떤다고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목 상태를 조절한 뒤 무대에 올라간다고 한다.
중후한 목소리의 농담을 듣고 있자니 이질감이 살짝 드는데, 여자주인공 비올레타 역을 맡은 박현정 씨가 분장을 마치고 아름다운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부산에서부터 드레스를 입고 출근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페라 가수들이 각자의 목을 풀고 있을 사이, 박지운 지휘자는 대기실 안에서 공연을 위한 대본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경북대학교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창작오페라 '선덕여왕' 작곡, '포은 정몽주' 작곡, '운수좋은날' 대본과 작곡 등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박 지휘자는 "김해문화의전당에서 공연을 많이 했지만 '아침의 음악회'는 처음이다. 조금 긴장된다. 직접 기획을 했다.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짧은 시간에 모두 보여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중간에 해설을 넣은 미니 콘서트 방식으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공연 시작을 5분 앞둔 10시 55분. 누리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들 좌석을 청소하고, 무대 위의 세트 배열을 맞추기도 하고, 영상자료를 화면에 띄워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사도 한다. 마이크 테스트와 스피커 검사까지 마쳤다. 이찬우 감독은 무대 뒤 작은 컴퓨터 모니터 두 대 앞에서 헤드폰을 낀 채 모든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음이 울린다. 누리홀로 관객들이 밀려온다. 관객들이 좌석을 찾아다니면서 내는 발소리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 연주 같다.
곧이어 박지운 지휘자가 무대 앞에 섰다. 그는 맑고 잔잔한 음색으로 공연에 대한 해설을 시작했다. 이날 공연은 총 3막으로 전개됐다. '오, 얼마나 창백한지!', ‘영원인 것 같은 그 어느 하루’, '언제나 자유롭게', '아,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나를 위한 사랑으로 산다네', '안녕, 아름다운 지난날이여', '아, 비올레타! 오, 당신이!' 등이 숨가쁘게 연주됐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은 것인지, 아직 채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인지 몽롱한 표정들이다.
지난 10일에 열린 3월 공연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이었다. 2월 공연에 이어 박 지휘자가 기획을 맡았다. 공연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파리 뒷골목 시인 로돌프와 폐결핵을 앓는 소녀 미미의 슬픈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라보엠'은 앙리 뮈제르의 소설 <보헤미안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제작된 오페라다.
이날 공연에는 소프라노 김아름(미미역), 테너 곽유순(로돌프역), 정승화(마르첼로역), 김신희(무제타역) 씨가 출연했다. 공연은 곽유순 씨의 독창 '이 홍해는 날 지겹게 하고 얼어붙게 만드네'로 시작됐다. 이어 김아름 씨는 '얼마나 차가운 손인가요'와 '나를 미미라 불러요' 아리아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3막에서는 중창이 주를 이뤘다. '미미? 당신이 여기에 있기를 기대했어요', '오, 미미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당신', '무젯타! 미미가 있어요' 등의 곡이 이어졌다. 공연은 약 90분 동안 진행됐다.
공연이 끝난 뒤 1층 로비에 이색 장소가 조성됐다. '아침의 음악회'의 특색이자 자랑거리인 '브런치'였다. 관객들은 이곳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씩을 건네받았다. 관객들은 편안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앉거나 서서 이날 공연에 대한 감상평을 풀어놓았다. 이명숙(52·삼방동) 씨는 "평소 같으면 오전에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무료하게 보냈을지 모른다. 오늘은 김해문화의전당에 와서 즐거운 일탈의 시간을 가졌다"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윤지희(40·외동) 씨는 "짧은 공연이 오히려 아쉽다. 저녁에 보는 공연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이색적이다. 대개 공연을 다 보고 나면 어두컴컴할 때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의 음악회'를 보고 나면 거꾸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공연의 여운이 더 오래 가는 것 같다"며 웃었다.
공연기획팀 서종호 차장은 "지난 10년 동안 '아침의 음악회'는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단골 관객들도 많이 생겼다. 경남 지역에서 마티네 콘서트가 이렇게 활성화된 곳은 드물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아직 온기가 남은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에게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다음 달에 보자는 약속을 남기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아직 누리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음악소리와 향긋한 모닝커피 향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아침의 음악회/2006년 3월 첫 행사 개최-2004년 9월 서울예술의전당 개최 이래 전국적으로는 8번째, 수도권 이남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처음. 이후 매월 두 번째 목요일 오전 11시에 진행. 지난해 6월 11일 100회 '디어 베토벤' 공연.
김해뉴스 /강보금 기자 amond@gimha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