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함께, 때론 따로 30여 년 살아
온 가족 둘러 앉아 함께 식사했던 집
어머니는 옛 모습 무척 그리우셨을 것
그 징표와도 같은 다섯 의자 소중히 챙겨
사라진 풍경 속 외톨이로 남은 집 쓸쓸

봉황동 99-13번지. 내 마음 속에 있는 집의 주소다. 나는 그곳에서 삼십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이사를 했다. 그 사이 실제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셨으니, 함께였거나 따로였거나 늘 그곳에서 산 셈이다. 이를 증명하듯 내 주민등록상의 거처는 잠시 옮겨져 있다가도 어느새 99-13번지로 돌아와 있곤 했다.
 
70년대 초, 전하교를 건너기 전 봉황동 일대는 10여 가구 남짓한 촌집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논밭이었다. 그 동네 입구에 처음으로 우리는 이층집을 지었다. 지금이야 집 축에도 못 끼는 그냥 낡고 초라한 구옥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그래도 부러움을 샀던 집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나 또한 거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집은 투정이라도 하듯 슬슬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동파하고, 집이 비어 있으니 온갖 쓰레기더미며 불법주차 차량이 밤낮으로 집을 포위해 못살게 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집이 좋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무렵 어머니 가게에 들러 주인 없는 자리에 대신 앉으면 현실에서의 모든 애환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문 밖과 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문 밖의 나는 그저 그런 흔하고 흔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러나 문 안에서의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는 존재의 가치에 저 혼자 도취된 오만한 필부였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처럼 앉아 밖을 보면 세상의 모든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 일러스트=이지산

어머니는 늘 해가 뜰 무렵이면 일어나 의자 다섯 개를 내놓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셨다. 그리곤 당신의 자리에서 기도로 하루를 보내셨다. 그 외에 간혹 친구분이라도 찾아오면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시는 것이 전부였다. 선대의 우리네 어머니들이 다 그러했듯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싶은 삶이었다.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낯익은 이웃과, 그냥 지나가던 사람과, 술에 취해 자고 가는 사람과, 그것을 이용해 담을 넘던 도둑까지, 부지기수였다. 말년에는 거동조차 힘들어 하면서도 꼭 의자만은 소중하게 챙기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언젠가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의자를 내놓아야 멀리서도 문이 열린 줄 알지. 하도 문이 자주 닫혀 있으니까 아예 손님들이 오지를 않아." 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하루 종일 병원을 순회해야 하는 몸으로 왜 꼭 그 무거운 의자를 내놓으려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불만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 자리에 대신 앉아 있던 어느날 문득 그 말 속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집이 처음 지어질 무렵의 주변 풍경은 전형적인 농촌마을 그것이었다. 구멍 뚫린 흙담장과, 있으나 마나한 문, 길보다 낮은 지붕, 밤새도록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것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옆에는 원룸이 옥상을 내려다보고 있고, 앞에도 뒤에도 고물상이 들어섰고, 길 건너 저쪽은 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그렇게 사라진 풍경 속에 외톨이로 남은 집이 또한 봉황동 99-13번지다. 원 주인이 안 계신 탓도 있겠지만 가게는 늘 조용하기만 했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물건을 훔쳐가던 불량소년들마저 간 곳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어느 일요일, 나는 이른 새벽에 봉황동을 찾았다. 가게 문을 열고, 거리를 쓸고, 화단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는 무심히 어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의자 다섯 개를 향나무 아래 갖다 놓았다. 그런 다음 나는 어머니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나도 몰래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추억의 편린들로 탑을 쌓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이따금 병원 길에 동행하던 어머니 친구분이셨다.
 
"하이고, 오랜만에 여기 의자가 나들이를 했구만. 맨날 의자를 내놓으면서 중얼거리쌓드마는…./ 예? 뭐라 그러셨는데요?/몰랐나?/뭘 말입니까?/그립았든기라, 할매가. 영감도 가고, 자슥들도 다 떠나고…. 그래도 너그는 수시로 디다보니 고맙다아이가. 저쪽에 ○○댁 하고, △△댁 하고, □□댁마저 다 가뿌고, 내사마 지대로 움직이도 몬하고, 그라다가 우째 함 와보먼, 할매 혼자 안자서 중얼거리싸서, 내가 멀 그래 중얼거리쌓는교? 그라이까네…/요거는 영감 자리, 요거는 큰 아 자리, 요거는 둘째 자리, 또 요거는 셋째 자리, 남은 요거는 딸애 자리…. 그라믄서 날 쳐다보고 웃기는 웃는데, 속으로는 아마도 웃는기 아인갑드라고…."
 
새 집을 짓기 전까지 우리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대성동, 서상동, 전하동, 강동…. 삶의 부침 또한 잦았다. 그 와중에 내 학력은 초졸로서 끝날 뻔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중학생이 되지 못했던 내 눈에 교복의 금단추가 장군의 별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여느 가난한 서민의 가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던 그 시절의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층집을 지은 것이다.
 
대략 10여 년 가까이 우리 가족은 봉황동 옛집에서 함께 지냈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다. 어느새 세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이 참 가깝고도 멀다. 이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다. 삶의 거리고 마음의 거리고 영원의 거리다. 아무튼  그때는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삶으로 인해 가족들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아마도 어머니는 더욱더 옛 모습이 그리우셨던 것이리라. 그 징표가 바로 다섯 개의 의자였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해가 거듭될수록 봉황동 99-13번지는 쓸쓸해져 갔다. 정들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이사를 가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오지를 않고, 집을 팔라는 부동산중개인만 수시로 들락거렸다. 처음엔 명상(?)을 방해하는 그들이 무척 귀찮았지만 나중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현실의 창은 아무리 두꺼운 감상의 벽도 거침없이 뚫는가 보다.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까닭에, 팔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고 해서,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처럼 인근의 부동산중개인이 원매자를 데리고 왔다. 흥정 외에 다른 말이 오고 갈 필요가 뭐 있었을까.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가격을 제시했지만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황당하게도 사려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모든 세상사에는 알맞은 때가 있고, 장소가 있고, 사람이 있다. 그걸 그날 새삼 깨달았다. 부동산중개인이 나가자마자 들어서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일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옷,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덥수룩한 얼굴, 선한 눈빛, 투박한 손…. 한마디로 전혀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몸도 마음도 한가지였다.
 
처음 보는 그도 역시 집을 사러 온 사람이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5분 남짓, 순식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집을 팔기로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망설이곤 했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좋은 집은 비싼 집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좋은 집은 좋은 이웃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기에 '천만 냥을 주고 이웃을 샀다.'는 '송계아'의 고사까지 생겨나지 않았던가. 내가 집을 판 까닭은 그를 좋은 이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인상이 그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그랬다.
 
주인이 바뀐 다음 봉황동 옛집은 낡은 옷을 벗었다.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족두리까지 얹었다. 완전 새색시가 된 것이다. 주인의 지극한 정성을 엿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확 바뀌었다. 비록 지금은 남의 집이 되었지만, 내 마음 속 99-13번지는 여전히 내 집인 것이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뜨면 지척에 있고 눈 감으면 아득한 추억 속에서 또 다시 맞이하는 눈부신 사월, 매화는 일찍 피어 어느새 졌을 게고, 가을엔 홍대추가 마당을 덮을 테지…. 어제는 구름 가듯 옛집에 들렀다가 주인의 얘길 듣고 활짝 웃었다.
 
"아저씨는 제 은인입니다./ 왜요?/ 제게 이 집을 주셨으니까요./ 그게 무슨…/ 저 말고도 사려는 사람이 많았잖아요. 그런데도 저를 보자마자 별 흥정도 없이 넘겨주셨잖아요./ 그거야, 값을 받고 판 것이지, 어디 그냥 주었나?/ 아무튼, 저희는 이 집에 이사 와서 너무 너무 행복하답니다. 작년엔 매실과 대추가 많이 열려 이웃과 조금씩 나눠 먹었구요, 사업도 잘 풀려서 바다 건너 집 한 채를 더 샀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덕담 삼아 한 마디를 보태주었다. 좋은 사람이 살면 좋은 집이 되는 거라고…. 김해뉴스




>> 이현우/경북대 졸업. 시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문학> 통해 등단. 시집 <오늘 날씨는 우리들 표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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