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가지고 시작한 더블린 여행
실망감에 기네스 공장으로 술 순례하다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과 조우

건물 밖 정원 벤치에 누군가 있어 가보니
발등에 못 자국 노숙자 모습의 ‘예수상’
자신의 허물 밖으로 드러낸 용기에 찬사

도시, 특히 대도시의 모습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사피엔스 종은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적으로 지구 전체를 점점 더 큰 덩어리로 뭉쳐 가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간판만 아니라면 이제 서울이나 도쿄의 거리는 서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졌다. 뉴욕이나 런던도 그렇고 이번에 처음 본 더블린도 그랬다.
 
여행의 시작은 대부분 환상이다. 적절한 주의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촌철살인의 명언으로 더 유명한 버나드 쇼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와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쓴 예이츠 등등 많은 작가들이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들이 내게 많은 환상을 심어 놓았다. 알고 있다. 환상이 지나치면 여행을 망친다. 프란시스 베이컨을 보는 정도로 기대를 덜었다. 그 정도면 딱 좋겠다. 우선 내셔널갤러리로 가 아일랜드의 화가 베이컨의 작품을 찾아보자 했다.
 

▲ 아일랜드 더블린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 건물 밖 정원 벤치에는 '노숙자 예수' 동상이 놓여 있다. 이 동상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 일찍 서둘러 더블린 최고의 대학이자 최고의 관광지인 트리니티 칼리지 건너편에 위치한 국립미술관으로 갔다. 너무나도 직설적인 이름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정말로 길쭉하게 생긴 롱룸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1시간 이상씩 줄을 서는 트리니티 칼리지와 달리 국립미술관 쪽은 조용했다. 입구부터(다행히 무료다) 전시장까지 미술관 전체가 엉뚱한 날 잘못 찾아간 오일장처럼 한산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짜임새 있는 건물(작지만 내부의 배치는 훌륭하다)에 비해 소장품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이컨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망감이 컸다. 가고 싶은 곳이 또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의욕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그래도 하며 생각해 낸 것이 기네스 공장이었다. 마침 며칠 고생하던 배앓이도 가져온 약 덕분에 좋아지고 있었다. 아일랜드에 왔으니 아일랜드 사람처럼 술 한번 마셔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과 두부는 여행 시키는 게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라고 한다. 하루키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았겠지만 그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술과 두부를 주식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술에 관한 책을 쓰고, 또 두부 먹는 법을 알려주는 정말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적은 책을 출판해 인세를 받으며 그걸로 또 두부를 사 먹으며 살고 있다. 하루키 자신 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늘 두부를 먹인다.
 
아무튼 술과 두부의 전문가인데다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하루키의 충고니 권위는 충분하다. 그러니까 하루키에 의해서 기네스 공장에서 마시는 기네스 맥주는 세계 최고의 기네스 맥주라는 확실한 보증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바로 그 우연한 도보 술 순례 길에서 이제 막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바로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정확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이면 정확한 게 좋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다녀오는 길이었다. 우선 기네스 공장 팩토리에 도착해서 마셔본 기네스 맛부터 이야기하자. 맥주를 잔에 따르는 기술 자격증을 가진(세상에 술을 따르는데도 '쯩'이 필요하다는 말을 거기서 처음 들었다. 물론 관람객도 줄을 서서 잠시 교육을 받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약간 허접한 쯩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기술자로부터 맥주를 받았다. 그리고 집 근처 더블린이란 이름의 맥주 가게에서 마셨던 기네스 맛을 떠올렸다. 하루키가 옳았다. 술은 여행 시키는 게 아니다.
 
하루키는 두부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두부를(일본의 두부는 우리나라의 것 보다 많이 부드럽다) 젓가락으로 툭 떠서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입에 넣고 꿀꺽 삼켜야 한다고 했다. 내 생각엔 맥주도 두부와 같다.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조금씩 마시는 게 아니라 꿀꺽 삼켜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두부와 마찬가지로 맛있는 맥주는 안주가 필요 없다(내 생각이다. 원한다면 된장찌개를 안주로 먹어도 상관 않겠다). 술이 거푸 두잔 들어가니 지금까지 실망스럽던 더블린이 사랑스럽게 변했다. 마술의 술이 아니라 그냥 술이 마술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가슴 설레던 더블린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보다는 어디서 한잔 더 마시고 싶어졌다. 패링턴이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를 기다리던 오코넬 다리가 보이는 곳이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단편들 중 '분풀이'가 좋다. 꼭 그래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떠나오기 전 환상을 단단히 경계 했단 이야길 앞서 했다) 패링턴이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시계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가던 플릿 스트리트에 숙소를 잡았다(물론 소설 속 전당포는 없었다). 아무튼 조나단 스위프트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성패트릭 성당에 한번 들렀다 갈까 하던 처음의 마음을 바꿨다. 이젠 걸음이 리피 강 쪽으로 향했다.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과 성패트릭 대성당은 나란히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이 세워진 것은 1030년이고, 성패트릭 대성당도 문을 연지 900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리고 이들 두 교회는 현재 성공회로 알려진 영국국교와 같은 아일랜드국교 소속이다. 개신교(영국국교) 교인수가 대다수인 영국과 달리 아일랜드국교 교인의 숫자는 여전히 인구의 3%에 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국민의 90% 이상은 로마가톨릭이다.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한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근 4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정치 경제적 문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90%의 아일랜드인의 마음엔 큰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책 선전은 아니지만, <더블린 사람들>에는 그들의 분노와 애환이 잘 표현되어있다. 아일랜드 남서쪽 케리 지방의 여행길에서 만난 한 아일랜드 아줌마의 표현을 빌리면 '더 어둡게' 표현되어있다.
 
리피 강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는데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 건물 밖 정원 벤치에 누군가 누워있다. 가까이 가서보니 실제 사람은 아니다. '노숙자 모습이라고 보기 싫다고 시에서 철거하라고 할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해주며 '나름 센스 있게 잘 만들었군'하며 듣는 이 없는 칭찬의 평론을 남기며 지나가려다가 다시 자세히 보니 발등 쪽이 유별나다. 못 자국이다. 그렇다, 스티그마타, 성흔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교회 밖에서 비를 맞으며 노숙자가 된 예수가 거기 있었다. 처음엔 국교회를 비판하는 뜻으로 누군가 임시로 교회 앞에 설치한 것은 아닐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니다. 벤치의 위치가 이미 교회의 정원 안쪽이다. 교회의 허락 없이 설치하진 못했을 거다. 교회 스스로 혹은 적어도 교회의 묵인 하에 교회 밖으로 쫓겨난 예수 고난상을 만들어 바로 거기에 그런 모습으로 놓아둔 것이다.
 
노숙자든 소외된 자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대접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이다. 하지만 노숙자의 모습을 한 예수를 교회 밖에 설치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관용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 사피엔스라는 종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사랑과 자비는 물론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 사랑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이런 용기 있는 관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루키가 보증한 최고의 기네스를 아내의 잔까지 빼앗아 거푸 두 잔을 마셔 기분이 좋은 김에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김해뉴스




>>윤봉한
/시인. 김해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붉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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