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밝히던 벚꽃 지고 마을엔 온통 신록
비 그친 오후 제방 너머로 쑥 캐기 행차
차 댄 부근에 온통 쑥… 잡히는 대로 뚝뚝
코끝에 진하게 풍기는 냄새에 만취

청정한 곳으로 남아있는 도요마을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재배도 하지 않아
사람은 자연을 닮고 자연은 사람을 닮아

매화 피고 벚꽃 피고, 쑥 캐는 사람 왔다갔다하고 감자 심고 하던 풍경을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오월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하얗게 길을 밝히던 벚꽃이 진 도요마을은 이제 신록으로 덮여 있다.
 
엊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오후 무렵 그치는 걸 보고 장갑이며 바구니를 챙겼다. 쑥 뜯기에 이만한 날이 없다. 황사며 미세먼지가 씻겨나간 깨끗한 쑥을 뜯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씻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딴에는 머리를 쓴 것이다. 쑥 뜯은 뒤에는 삼랑진 목욕탕에 다녀올 작정으로 차를 빼냈다.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작업하고 있는 도요창작스튜디오를 돌아가면 4대강 사업 때 만들어진 제방이 있다. 목적지는 제방 너머 들판이다.
 
다 늦은 오월에 웬 쑥이냐 하겠지만, 사실 쑥의 기운은 오월 무렵에 가장 왕성하다. 너무 자라 뻣뻣하지도 너무 어려 부드럽지도 않은, 살이 오른 모가지를 똑똑 따서 떡을 해 먹어도 좋고, 말려 차를 만들기에도 딱 요때가 좋다. 작년 이맘때는 잎과 뿌리까지 듬뿍 장만해서 설탕을 뿌려 두었다가, 몇 달 묵힌 뒤에 물에 타서 먹으니 향긋한 쑥냄새가 그만이었다. 올해는 쑥을 넉넉히 따서 말릴 작정이다. 삼 년 정도 그늘에서 잘 말린 쑥은 의초(醫草)라 하여 옛날부터 귀하게 쓰였다고 들었다. 맹자도 7년 묵은 지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해 쓰라 했다고 한다. 굳이 약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봄이 되면 서너 가지 차는 만들어 두어야 성이 찬다. 감잎차와 목련꽃차를 만들었으니 쑥차를 더하면 딱 좋을 것이다.
 

▲ 일러스트=이지산
지난 주에 가야문화축제 식전 행사를 치른 단원들은 서울과 부산으로 흩어져 다음 공연에 참여하거나, 도요에 남아서 다음 작품 연습을 하고 있다. 모두들 얼마나 열심인지 지나다니기가 조심스럽다. 이렇게 쑥 같은 걸 캐러 갈 때면 또 영 무안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스튜디오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극장이 있는 아래채에서 시도때도 없이 수런거리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점심 먹고 쉬는 중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소연 씨가 매 준 길다란 줄을 따라 신나게 오락가락하던 산복이, 도요, 흰순이, 센만이 아직 축축한 땅바닥을 쳐다보며 무료하게 앉아 있다.
 
지난 겨울 소연 씨가 말끔히 쓰레기를 치운 스튜디오 뒤편을 따라간다.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에는 케일이며 상치, 쑥갓 등 부지런한 소연 씨가 심은 푸성귀 어린 싹이 돋아 있다. 무용하는 사람이라선지 소연 씨는 몸이 몹시 재빠르고 가볍다. 연희단거리패가 하는 작업 중에서 안무를 맡고 있는데, 최근에는 도요창작스튜디오 관리까지 담당하고 있다. 재빠른 몸에다가 또 시원시원한 성미라서 이런저런 일을 곧잘 해치운다. 지붕에 비가 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보면 어느 사이에 보면 지붕에 올라가 있고, 벽에 물이 스미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보면 언제 또 벽지를 바르고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읽고 쓰는 게 큰 벼슬인 줄 아는 나는 매번 놀라고 또 놀란다. 
 
그러고 보니 지난 겨울 소연 씨는 대규모 발굴(?) 작업을 해내기도 했다. 어느 땐가 도요창작스튜디오에서 도예가들이 입주해 작업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쓰레기를 치우던 소연 씨가 도자기 파편들이 대거 묻혀 있는 걸 발견하고 파낸 것이다.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단원들이며 남편도 모두 그 대대적인 발굴에 혀를 내둘렀다. 발굴된 것 중에는 깨지지 않은 것도 꽤 있었다. 도자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를 비롯해 여러 단원들이 달려들이 각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그러고도 남은 것을 챙겨서 소연 씨는 스튜디오 곳곳에 비치해 두었다. 담배를 피우는 단원들이 재떨이로 쓰도록 말이다. 그렇게 도자기를 발굴하고 쓰레기 치운 자리에 돋아난 풀이 소연 씨처럼 소박하고 예쁘다.
 
제방 너머는 화장실과 주차장, 원두막까지 갖춘 도요문화공원이다. 차를 대고 장갑과 바구니를 챙겨 내렸다. 낙동강은 이쪽의 도요문화공원과 건너편의 작원잔도(鵲院棧道)를 따라 유장하게 흐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길을 내고, 벼슬아치의 행차나 군사용으로 사용했다는 잔도는 관로(官路)여서 민간인은 절대 지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한 번은 민간인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사또 행차를 만났는데, 비킬 곳이 없자, 그만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잔도를 따라 진군한 왜군을 밀양부사와 의병들이 막아서서 힘든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작원잔도를 따라 낙동강 천리길을 잇는 자전거도로가 달리고 있다. 이쪽에서 자전거가 달리는 풍경이 환히 보이고 우렁우렁 말소리까지 들린다. 오늘은 비가 내린 탓인지 자전거는 보이지 않고, 잔도를 품은 천태산만이 맑고 깨끗하게 솟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차를 댄 부근에 온통 쑥이다. 어느 곳이나 깨끗해 가릴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대로 뚝뚝 딴다. 통통한 것이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다. 코끝에 진하게 풍기는 쑥냄새에 잠시 취해 있는데 은색 소형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아주머니 둘이 내리더니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곧장 넓디넓은 공원으로 향한다. 쑥이든 뭐든 뜯어갈 작정을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잘 찾아왔다. 도요마을은 축사며 공장이 없기로 김해에서 거의 유일한 곳이다. 가까이로 물금과 창암에 취수장이 있고, 그래서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선지 식당도 찻집도 없다. 아마 허가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참 딱하지만 도요마을사람들은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이 청정한 곳으로 지켜지고 있으니 다행이라 말한다. 신기한 곳이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는 또 비닐하우스니 뭐니 하는 시설재배도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감자나 고구마, 벼, 콩, 배추, 무 같은 작물들을 심어 거두기만 하니, 사람은 자연을 닮고, 자연은 사람을 닮았다.
 
다시 무심히 쑥을 뜯는데 문득 종알대는 소리가 들린다. 오월이 와서 갖가지 놀라움이 쌓여 얽힐 때/꽃가지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은혜로운 축복이/조용히 방울져 떨어져 올 때/ 그때 너를 만났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 내가 나에게 종알대는 소리다. 오월이 되면 저절로 읊조려지곤 하는 릴케의 시 '오월이 와서'이다. 조금 머슥하긴 했지만 기분이 영 좋아서 허리를 펴니 강 건너 경부선을 따라 ktx가 지나간다. 적당히 자란 쑥은 금방 그릇을 채운다. 비가 온 뒤라 씻을 필요 없이 깨끗하다. 이대로 그늘에 말리면 된다. 
 
한바탕 쑥을 뜯은 뒤에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목욕탕에 들렀다 집에 오니, 자전거 한 대가 느릿느릿 내 집앞을 지나간다. 감자 심을 때만 해도 왁자하던 도요마을은 감자를 캐는 여름까지 농한기다. 그래서 지금 저 자전거도 느릿느릿한 것이다. 감자를 캐고 나면 곧장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 쯤이면 온마을이 또 부산스럽겠지. 차를 마당에 넣은 다음 대문을 닫으려는데, 조금 전에 지나갔던 자전거가 또 지나간다. 저 분이 왜 저러시나 하고 빼꼼 내다보니 저만치 갔던 자전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얼마 전 마을 구판장이 문을 닫았다. 거기서 심심찮게 술추렴을 하던 도요마을 주당들이 갈곳을 잃었다. 자전거로 세 번 내 집 앞을 지나간 사람도 주당 중의 하나다. 비 그친 뒤 목이 칼칼하여 뒷집 주당을 만나러 왔는데 아마 집에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저렇게 빙빙 돌다니. 오월이 와서 갖가지 놀라움이 쌓여 얽힌다.





>>조명숙/김해 생림에서 태어남. 김해여고 졸업.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조금씩 도둑><댄싱맘> 등 다수. mbc창작동화대상, 향파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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