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에 올랐다 눈사람이 되어 내려와
 어느 쪽으로 갈 거냐는 아가씨들 물음에
 이정표 보고 엉겁결에 답한 ‘법성포’

 늦은 저녁식사 허겁지겁 끝나 갈 무렵
 비틀거리던 젊은이 우리 밥상 ‘와장창’


법성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무작정 나선 길의 종점이었지요. 그분과 나 사이엔 그전에도 이런 식의 즉흥적 여행이 종종 있었답니다. 겨울이었어요. 우리는 함께 광주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떠날 때는 화창했던 날씨가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흐려지더니 도착할 즈음엔 오락가락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무등산이었습니다. 그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실은 그분이나 나나 광주에 대해 아는 곳이라곤 거기뿐이었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 '무등을 보며'에서 익힌 지명, 무등산은 마치 엄하면서도 인자한 아버지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날따라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과 나는 저만치 떨어져서 뒷모습이 보일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한참을 걸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간헐적으로 내리던 눈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앞을 가렸습니다. 산은 적막하고, 들리는 소리라곤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 소리뿐, 저 아래 보이는 모든 건물이 마치 상여를 따라가는 흰옷의 행렬처럼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느낌이 든 까닭은 그때가 바로 1980년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눈은 사선을 그으며 쏜살같이 지나가고, 아마 칠부 능선 쯤 올랐을 거예요, 그분이 발걸음을 멈춘 것은. 그제야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습니다. 눈사람이 따로 없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이 새하얀데, 눈과 입만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뜻밖의 환대에 감격해서 아무 말 없이 싱긋 웃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분이 먼저 백석의 시를 읊었고,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나는 그 뒤를 이으며, 서로 주고받으며, 서너 시경 산을 내려 왔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속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다 들어있었으니까요.
 
어디쯤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북소리와 일치된 군화발자국으로 끝을 맺는 영화음악 '북경의 55일'이 흐르는 어느 동네 빵집이었나? 서너 명의 아가씨들이 난생 처음 듣는 전라도 사투리로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 일러스트=이지산

우리가 들어서자, 한 아가씨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와! 눈사람이다, 눈사람!" 그러자 다른 아가씨들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발견하곤 일제히 박수를 쳤습니다. 출출했던 우리는 빵을 넉넉하게 시켰고, 건너편 아가씨들에게도 한 접시 듬뿍 선사했고, 감사의 표시로 활짝 웃던 그날의 함박꽃 같은 얼굴들. 지금 창밖엔 비 오고 바람 불고, 나는 그네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고, 머물다 떠난 추억의 자리에서 저들은 그날의 눈사람을 기억이나 할까?
 
어둠이 깃들 무렵, 퍼붓던 눈도 여위어가고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나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디 쪽으로 간다요?" 내게 한 아가씨가 물었지만 나는 머뭇머뭇 답을 못했습니다. 다음을 정한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분의 입에서 '법성포'라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가씨들은 손을 흔들며 떠났고,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법성포라고? 거기가 어딘데?" "몰라." "모른다고?" "그런데, 왜?" "아니, 그냥… 저어기 이정표가 보이길래…." 이렇게 해서 정해진 행선지가 바로 법성포였습니다. 그리로 가는 택시 안에서 우리는 줄곧 누가 더 대책 없는 사람인가를 따지며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인적이 끊어진 도로, 연신 하품을 해대는 그분과 나, 망부석처럼 앉아 핸들만 조종하는 기사님, 혼자서 눈을 치우느라 안간힘을 쓰는 와이퍼…. 이들이 한 조가 되어 달려가는 차창 밖의 풍경은 아등바등하는 이 세상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상, 저 어둠 속의 눈처럼 온갖 더러움을 다 덮어주는 그런 곳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묘한 행복감에 젖어드는 순간, 갑자기 '삑~ 삐이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동시에 "아이쿠! 큰일나부렀네잉" 하는 기사님의 비명이 들렸고, 덜컥 차가 멈춰 섰습니다. 나중에 보니 고장난 와이퍼가 유리를 긁는 소리였어요.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낯선 곳에서 세 사람은 뜻하지 않게 차에서 내렸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과, 눈과, 정적 속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하나가 되어버린 우리 세 사람. 사는 곳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헤쳐가야 할 눈앞의 현실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분과 나는 다시없을 환상적 분위기에 금방 취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사님은 전혀 다른 마음이었을 겁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다급했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작은 기쁨이 남의 큰 아픔보다 우선인가 봅니다. 한 날 한 시에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기사님은 고장난 와이퍼를 손보느라 정신이 없고, 우리는 눈싸움을 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우리는 각자의 감정에만 충실한 조화롭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속력을 한껏 줄인 기사님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엄숙하게 보였습니다. 한 십여 분쯤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였습니다. 전조등 불빛에 가로수를 들이받고 나뒹군 트럭 한 대가 비치자, 갑자기 차 안에는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뭔가 좀 미안하고 걱정스런 생각이 들어 나는 기사님을 불렀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그 기사님은 대답 대신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실내경을 통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때, "어? 저게 뭐지?"하고 그분과 내가 동시에 놀란 것은, "외눈밖이잖아!" "그러네?" 기가 막힌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움직이는 와이퍼가 한 개 뿐이었거든요. 조수석의 유리에는 소복히 쌓인 눈이 솜이불처럼 덮여 있었고, 운전석의 와이퍼만 혼자서 왔다 갔다 애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일순, 우리는 기사님의 표정을 다시 한번 살폈습니다. 그 쪽은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정말 기묘한 사건이 아까부터 연출되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럭저럭 해서 차가 법성포에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지나서였습니다.
 
"자, 자, 이제 거진 다 왔쏘. 조오기 저 산모퉁이만 돌무는 법성포응께." 원래 그런 건지 그렇게 느껴진 건지 첫눈에 들어온 어귀의 집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주 익숙하게 어느 식당 앞 가로등 아래로 우리를 안내한 기사님의 표정은 시원섭섭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요금을 치르는 사이, 나는 먼저 내려 낯설고 먼 서쪽 포구의 눈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해 봄날, 삼랑진역의 벚꽃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곳이지요. '마주 보며 함께 가면서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철길 위에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그 애잔한 생명들….' 그날 거기서 나는 잠시 남모를 감상에 젖었답니다.
 
때가 때인지라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지요. 우리가 앉은 식탁의 반대쪽에는 늙수그레한 노인과 한 젊은이가 거나하게 취해서, 대화하는 틈틈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콩나물국밥, 선짓국, 소머리곰탕.' 벽에 써 붙인 메뉴들 중 한 가지를 골라 똑같이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도마 위의 칼질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치웠는지 모릅니다. 기사님이 맨 먼저 숟가락을 놓았고, 겨우 허기를 면한 내가 막 그릇 밑바닥을 긁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쪽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갑자기 비틀거리며 밥상 위에 엎어져 버렸습니다. 순식간이었지요. 국물과 반찬이 사방으로 튀고, 얼굴이며 옷이며 안경에까지 날아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잽싸게 일어섰고, 기사님은 용수철처럼 튕겨나가 벽에 붙었고, 식당 주인은 비명을 지르며 쫓아와 치우기에 바빴고, 젊은이와 함께 있던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 그런데, 그 와중에 홀로 초연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코를 골고 있었거든요….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노인이 술을 시켰습니다. 시계가 어느덧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따, 이럴 것이 아니라, 아짐씨 여그 상 봐 주랑께!" 노인이 재촉을 하자 "뭔 눈이 요러코 많이 내린당가잉?" 기사님이 화답하듯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아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여그서 이러고 만난 것이지라우." 다시 노인이 말을 받았고, 마지못해 나도 "야, 정말 이런 눈은 난생 처음입니다" 하고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잠시 후 술상이 차려졌습니다.
 
"왔어유, 즐겁게들 얘기해유." 늘어지는 말씨가 술상을 푸짐하게 덮으며 지나가자, 찌개는 한가운데서 보글보글 끓고, 우리는 다 같이 술잔을 들었습니다. "아고매. 속이 다 후련해부요. 앓던 이가 쑥 빠진 것 같이 속이 다 시원해분당께." 황소 물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켠 기사님이 먼저 잔을 비우고 한마디 던졌습니다. 뒤이어 저마다 차례로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보은댁! 집이도 와서 한잔 해부시요! 이 밤에 뭣 헐 거 있다고, 손두 업는디." 노인이 식당주인을 부르자 기사님이 거들었고 그분과 나도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면부지의 다섯 사람이 합석하게 되었습니다. 눈 그친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고, 우리는 기사님의 굴곡 많은 인생담에 취해 함께 웃고 함께 탄식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벽시계가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분위기는 무르익어 마치 오랜 지기들의 만남처럼 마음이 훈훈해져 갈 무렵, 갑자기 모두들 들뜨기 시작 했습니다. 이야기가 정치 쪽으로 흘렀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때마침 12대 총선을 치른 2월이었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날이야말로 엄혹한 5공의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날이 아닙니까. 남녀노소, 동서불문하고, 그때는 모두가 한 마음이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바로 그 간절한 소망의 싹을 보았으니까요. 지금도 감개무량합니다. 양 김 씨와 이민우 총재가 이끌던 산한민주당이 철권통치의 한쪽 벽을 허물었던 1985년 2월 12일. 그로부터 어언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국민들은 마침내 뜻을 이루었고, 곡절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요? 역대 최악의 국회는 어쩌다가 저런 꼴이 되었을까요? 오로지 '나만의 정의'에 매몰되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정치의 계절이 되면 나는 늘 그날 그 사람들의 넋두리가 습관처럼 떠오르곤 한답니다.
 
"…이 정권만 몰아내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오긴 올까요?" "글쎄, 암튼, 지금보단 낫겄제. 그런 날을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거 아니것쏘?" "먼 소리? 그런 날은 무슨 얼어 죽을…. 독재자는 말할 거도 없고, 민주다, 자유다, 뭣이다 앞장서 떠드는 작자들도 다 마찬가지랑께. 정치하는 놈들이 백성 걱정허는 줄 아시요? 어림 없제라우. 알고보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정치 장사꾼들이제, 안 그러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라? 허허, 그땐 저 혼자서 세상 바꾼 거처럼 공치사허다 즈그들끼리 쌈박질헐 팅게. 우린 언제나 들러리들이지라우, 암 들러리고 말고라우. 우린 그저 소달구지 오가는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맹이 신세일 뿐이랑께. 언제는 안 그랬간디? 옛날에도, 지금도, 낭중에도 그럴껀 게 두고 보믄 알 꺼 아니여?" "소달구지? 차라리 그 시절이 그립구나." "그려유. 그 시절이 좋았지유. 없이 살어두 마음만은 넉넉했잔하유? 나눠 먹을 줄 알구, 같이 아퍼할 줄 알구." "앗따! 보은댁도 그 시절을 안당가?" "왜 몰라유?" 가난한 부모 따라 댕기믄서 먹구 살려구 울매나 고생했는데유. 지금두 그때 생각허믄 갠히 서럽단게유. 불쌍하지, 우리 엄니, 한평생 허리 한 번 못 피구…, 돌아가시는 날꺼정 자식 걱정만 하셨데유. 요즘 애들은 내 자식 넘의 자식 헐 것 없이 부모 생각하는 것들 별로 없을 거유. 돈이나 많으먼 그거 뺏을라구 효도하는 척이라두 할란가?" "아믄 그러제, 사람이 기리운 시상이제. 그랑게 그 시절을 기리는 거여. 안 그려 보은댁?" "맞어유, 옛날엔 이런 집도 시끌벅적 했지유, 젓가락 장단 맞추느라구." "아하, 그렇구나, 젓가락 장단…." "그러구 봉게 고것도 옛말이 되야버렸구만이라." "그땐 상머리가 남어나질 안했지만서두 그런 대루 오가는 정이 넘쳐났잖어유?" "자, 자, 우리 이랄 게 아니라 말 나온 김에 소리 한번 맞춰 보믄 어떻컷소잉?" "아, 그거 좋지요."
 
순식간에 식당 안은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사~아~고~옹에~뱃~노오~래…." 기사님이 먼저 구성지게 '목포의 눈물'을 뽑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신명나게 상머리를 두드려댔습니다. 노래는 주로 흘러간 옛 노래였어요. 권하고 기다릴 것도 없었지요. 한 사람이 끝나면 다른 사람이 잇고 또 그 다음 사람이 잇고, 메들리로 수십 곡은 불렀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설움, 만포선 길손, 외나무다리 등등을 거쳐 마지막은 보은댁이 '충청도아줌마'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 흉금을 터놓고 불렀던 법성포에서의 젓가락 장단…. 우리는 저마다 가슴 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유행가에 실어 눈 덮인 항구로 떠나보냈습니다. 아마 한 시가 훨씬 넘었을 거예요, 우리가 일어난 시각이.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후, 그분과 나는 근처 바다로 나갔습니다. 낮은 지붕들은 굴속의 토끼처럼 눈 속에 잠들어 있고, 운무가 짙게 깔린 거리를 지나 우리가 닿은 곳은 선창이었습니다. 거기서 폭설 아래 묻혀있는 그물을 보았습니다. 비록 열려 있으나 빠져 나갈 수 없는 구멍, 그물코. 그 속에서 발버둥치는 물고기. 세속의 그물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이와 다를까요? 글쎄올시다. 이렇든 저렇든 수평선 너머 저 멀리 법성포의 새벽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에서 오늘도 동이 트고 있겠지요?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간혹 인생이 배신하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이현우/경북대 졸업. 시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문학> 통해 등단. 시집 <오늘 날씨는 우리들 표정> 외.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