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들 전쟁·착취의 결과물
식민지 늘리며 사탕수수 재배
한국, 일본 영향으로 설탕에 푹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해부터 성인 기준 1일 설탕 권장 섭취량을 50g에서 25g까지 대폭 낮췄습니다. 설탕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비만을 유발하거나 당뇨, 고지혈, 고혈압이나 각종 질병의 발병률을 높이기 때문에 많은 섭취를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2015 한국인 영양소 섭취기준(DRI)'에 따르면 한국인의 하루 평균 당류 섭취량은 61.4g으로 설탕 15스푼에 달합니다. 설마 이만큼이나 먹을까 생각을 하지만 탄산음료 한 캔에 들어있는 설탕의 양이 약 27g 정도이고, 믹스커피에 들어있는 설탕의 양이 약 7g에 달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권고량의 2배를 넘겨 섭취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천연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당분이란 꿀과 과일류뿐인 이유로, 설탕을 직접 만들어 섭취하기까지는 많은 노동력과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설탕이 요즘엔 싸고 흔한 재료이지만 예전엔 귀족들이나 음미할 수 있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흔해서 오히려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설탕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벌꿀을 이용하여 단맛을 내던 인간이 처음으로 설탕을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인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설탕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고, 7~8세기에 이르러 이슬람교도에 의해 사탕수수 재배 및 제조 기술이 유럽으로 전래되어 동부 지중해의 여러 섬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되었습니다. 16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에는 라틴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그리고 카리브해 연안에서 식민지배에 의한 대규모 사탕수수 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탕수수 재배는 기후조건이 적당해야 하며, 토질을 황폐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어서, 계속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동해야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 뿐 아니라 사탕수수로부터 가공된 설탕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단맛에 푹 빠진 유럽 열강들은 그들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식민지를 계속 찾게 되었고 19세기에 와서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됩니다.
 
우리나라가 설탕에 빠져드는 과정에는 일본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린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문을 굳게 닫은 일본에게 선교사를 통해 유럽의 달콤한 음식들을 소개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정리한 <다이코기>의 첫머리에서 유럽 각국이 선교사를 앞세워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상황이 나옵니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일본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그들은 술 잘하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술 못하는 사람에게는 카스텔라, 보루(구운 과자의 일종), 캐러멜, 아루헤이토(설탕을 졸여 각종 모양으로 만든 엿), 별사탕 등을 베풀어서 자기 종교로 끌어들이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선교사들은 단 맛을 접하기 힘들었던 일본인들을 백설탕, 흑설탕, 얼음설탕 등의 다양한 설탕을 이용한 과자로 유인했습니다. 이 시기 이후로 일본인들은 유럽 및 중국 남부로부터 대량으로 정제 설탕을 수입하여 '화과자'라 불리는 일본식 과자를 성립시키고 18세기 중기 때 설탕의 국산화에 성공하여 서민들도 설탕 맛을 즐기게 됩니다. 카스텔라나 별사탕 같이 16세기에 유럽에서 전해져 일본에 정착한 각종 과자, 근세 일본의 설탕 문화가 만들어 낸 단팥죽, 팥빙수, 붕어빵, 오방떡, 찹쌀떡, 양갱, 그리고 근대에 서구에서 도입된 빵과 '일본적' 식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믿어진 단팥을 결합시킨 단팥빵 등은 조선시대 후기와 식민지 시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한반도에 소개되어 한국민의 간식으로도 친숙해졌습니다.
 
설탕의 역사는 전쟁, 지배와 착취의 역사적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또한 달콤한 맛으로 우리의 건강도 파괴하는 무서운 유혹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김해뉴스





조병제 한의·식품영양학 박사·동의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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