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마을 앞뒷집 이십 년간 죽마고우
 서로 어려운 처지 잘 알기에 동병상련 
 1986년 버스정류장 앞 아쉬운 이별

 30년만에 서울 강남서 재회의 포옹
 최고배우·경찰서장 영화 같은 만남

 세상 외면에 시달린 두 흙수저 인생
 그래도 남탓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이심전심

 북한산 등반길 이마에 맺힌 땀방울
‘오욕칠정 삶 속에 나도 잘 달려왔구나’

과거를 돌아보면 사람은 누구나 아련히 목이 캥기는 사람이 몇 명쯤 있는 법이다. 내겐 영화배우 송강호가 그렇다. 그와 난 죽마고우다. 김해 용등마을 앞뒷집으로 이십 년을 살았으니 소설을 쓰고도 남을 그의 성장사는 내 머리에 선하다. 그에게 나도 역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난 1986년 이후 만나지 못했다. 영화 '초록물고기' 이후 그가 서서히 유명해질 무렵 지인의 부탁으로 그에게 청탁성 전화를 한 번 한 적이 있고 내가 경정으로 승진했을때 그는 꽤 비싼 축하 난을 보내왔다. 난에는 '영화배우 송강호'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이 전부다. 가는 길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까. 한 번쯤은 만나야 한다는 추억에 대한 의무감조차도 없었던 것일까.
 
조병화 시인의 '하루만의 위안'이라는 시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1986년 겨울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경찰대에 합격하고도 나는 도무지 기쁜 마음이 없었다. 일반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때문에 경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침울했다.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동네 어귀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 마침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강호는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했다. 축하의 말을 했던 것 같고 안부를 물었던 것 같다. 나는 건성으로 응응하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강호는 몇 발자욱 나를 따라왔다.
 
그와 나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내가 목이 캥기는 이유다. 나는 왜 그렇게 옹졸했을까. 강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나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동병상련의 내가 외면한 그 순간을 품고 덜덜거리는 4번 버스에 올라 타 대한민국 최고배우가 된 지금까지 고난의 길을 넘고 넘으며 열심히 달려왔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강호의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고향마을 용등이 떠오른다. 마을 옆을 휘돌아 흐르는 정다운 낙동강,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카시아 꽃, 불우한 어린 시절,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현실, 짐이었던 그 모든 것들, 개인사를 잘 이야기하지 않는 그는 지금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이별하고 싶은 것일까. 그 누구의 이미지나 덕이 아닌 오로지 맨손으로 혼자 이룩해 낸 그의 무게가 내 나이쯤 되고 보니 고맙고 풍성하다.
 
얼마 전 친한 형님과 술을 먹었다. 형님의 아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배우 지망생이다. "송강호 친구 아이가? 전화 함 해바라."
 

▲ 일러스트=이지산

나는 전화번호가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허허로움과 어이없음,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나를 당혹케 했다. 수소문해서 문자를 보냈다. 시 길이만큼의 문자를 보냈더니 시 길이만큼의 문자가 왔다. 부산 내려갈 때 조만간 만나자고 했다. 나는 과거를 거슬러 1986년이듯이 만날 것이다. 그리고 '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를 음미할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 야유회를 따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흰 팬티를 입고 놀았는데 세련된 도시의 사람들과 조선비치호텔의 위용에 완전 주눅이 들어버렸다. 환타니 콜라 같은 것들이 바위 옆 물밑에 있었는데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르신들은 닭을 삶아 와 드시며 솔밭에서 씨름을 하고 놀았다. 나는 목이 탔다.
 
부산은 매년 영화제를 개최한다. 내가 언제쯤 영화제 개막식이 펼쳐지는 해운대경찰서장으로 간다면, 그래서 해운대 바닷가를 바라보며 강호와 술잔을 나누는 장면을 하늘에 계신 강호 할머니 희연댁과 나의 선친이 보신다면 무척 기뻐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촌놈들이 자라 한 놈은 대한민국 최고 배우가 되고 한 놈은 해운대경찰서장이 되어 조우한다면 좀 영화같은 이야길 수도 있겠다.
 
연락이 오면 영화배우가 된 첫사랑을 만나는 것쯤은 아니겠지만 약간 풀이 죽은 정수리 주변 머리를 사자갈기처럼 세우고 가능한 멋진 모습으로 첫인상에 강호의 기를 죽여야겠다. 나도 내 인생의 주연배우이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좋아했던 여배우 강수연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호야 부탁한다.
 
여기까지의 글은 몇년 전 개인적으로 써놓은 것이다. 정확히 30년이 흘러 우리는 해운대가 아닌 서울 강남에서 만났다. 내가 총경으로 승진을 하고 경찰대학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서 멀리 찢어졌던 인연은 강남 '우미호따루'라는 일식집에서 우리를 묶어 놓았다. 첫 잔은 30년만의 포옹이었고 둘째 잔은 "여기까지 온다고 정말 고생많았다"는 이심전심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통음과 술자리는 그날 밤만큼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강호는 '몇 미터 앞에다 두고'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몇 미터 앞에다 두고 말 한마디 끝내 붙이지 못하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의 노래다. 흙수저 중에서도 흙수저였던 우리, 세상이 그를 외면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는 돌아서지 않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남탓도 없이 뚜벅 뚜벅 세상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제는 세상이 그를 쳐다보게 만들어버렸다.
 
그야말로 세상에 할 말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더 좋은 작품으로 말하겠다고 말을 아낀다. 화려한 스타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작품을 향한 고뇌와 스트레스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다음 날 남산타워가 바라다 보이는, 그가 배려한 호텔에서 잠을 깬 나는 끊어졌던 인생의 한 철로가 복원되는 느낌을 가지며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삶의 오욕칠정이 얽히고설켜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는 사연이 피었다 사라지는 거대한 도시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나도 참 잘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송글 송글 맺힌 이마의 땀을 쓰윽 닦았다. 친구여! 다음 만날 때까지 안녕. 김해뉴스


 

 

>>소진기/수필가. 경찰대 졸업. 총경. 수필가. <수필세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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