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이 부러뜨린 도요마을 소나무 모습에
시다나무·일본인배우 얽힌 옛추억 떠올라

영어강사 하다 김해 내려온 특이 이방인
답답할 때면 나무 올라가 괴성 질러 눈길
신이치 귀국 직후 태풍에 나무 뿌리 뽑혀

1년간 ‘신이치의 나무’ 붙들고 작품 고민
모든 게 바람이 만든 일 큰 신세 진 듯

생림 도요마을엔 바람이 많다. 바람이 불 때 멀리 있는 산을 보고 있으면 참나무며 백양나무 같은 활엽수의 잎이 뒤집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뭇잎은 앞면과 뒷면의 색깔이 확실히 다르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진한 초록이지만 바람이 불어 잎이 발랑 뒤집어지면 초록에 살짝 하얀색이 덮인 잎의 뒷면이 보인다. 그렇게 잎들이 뒷면을 보여주는 날이면 산의 색이 수시로 변한다. 그 변화무쌍한 색의 변화를 보려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잠깐씩 산을 보며 앉아 있곤 한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대문을 닫아걸어야 한다. 철제 대문이 쉬지 않고 우장창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 일러스트=이지산

올해 4월에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느닷없는 강풍이었고, 개중에는 태풍이 아닌가 싶게 거센 바람도 있었다. 봄이 와서 아이 기분 좋아 방심하고 있을 때, 바람은 불청객으로 와서는 내 집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무례한 손님 같았다. 
 
나야 바람이 불면 부나 보다, 안 불면 안 부나 보다 여기면 되지만 연극할 때 사용되는 소품이며 무대 설비 같은 것들이 곳곳에 있는 도요창작스튜디오에서는 좀 센 바람이 불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널어둔 빨래가 날아가 구석에 처박히거나 개 밥그릇이 저만치 날아가 있고, 몇 년 전 제작되어 스튜디오 잔디밭에 있는 거북이의 몸도 절단이 난다. 거북이 머리와 앞다리가 여러 토막으로 나뉘어져 제작되었고, 소재가 가벼운 스티로폼이라 바람이 불 때마다 수난인 것이다. 바람이 잦아들면 거북이는 다시 제 모습을 되찾곤 한다.
 
그렇게 장난질을 치던 바람이 한 번은 꽤 세게 불더니, 기어코 소나무 한 그루를 넘어뜨렸다. 스튜디오와 이웃집 밭을 경계 짓는 울타리 앞에 서 있던 그 소나무는 우리가 이곳에 처음 오던 해에는 아주 멀쩡하고 싱싱했는데 언제부턴지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마르더니 지난해부터는 아예 잎 하나 달지 못한 채 서 있었고,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넘어가버린 모양이었다.
 
큰 나무가 넘어갔으니 어떻게 처리를 하나 나는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대장님과 소연 씨 등 도요창작스튜디오 식구들은 그 소나무가 비스듬히 누운 지점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다른 나무의 아래이니 그대로 두고 의자로 쓰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네. 나는 쓰러진 나무의 밑동에 가서 앉아 보았다. 죽었다고는 해도 아직 나무 냄새가 나는, 나무는 나무였다.
 
쓰러진 나무에 앉아 스튜디오를 채우고 있는 큰 나무들을 둘러보자니까 삼 년 전 태풍 때 쓰러진 커다란 시다나무가 생각났다. 그 시다나무는 스튜디오에서는 제일 큰 나무였고, 식당과 사무실 사이에 서 있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고, 겨울에는 공중을 지나가는 바람을 슬쩍 막아주어서, 아래에 의자를 여러 개 놓고 대장님과 단원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거나 차를 마셨다. 고된 일과 중에 잠깐 그 나무 아래 벤치에 않은 채로 단잠을 주무시던 대장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크기로 봐서 지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작초등학교 도요분교가 세워질 무렵 1967년에 심었을 거라 친다면 수령이 못 잡아도 50년이다. 이작초등학교 졸업생인 내게 이 나무는 아득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거기다 그 시다나무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신이치라는 이름을 가진 배우 때문이었다.
 
일본 어디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하다가 연희단거리패에 와서 배우가 되었다는 일본인 신이치와  내가 만난 것은 그가 한국에 온 지 일 년쯤 된 시점이었다. 신이치는 그럭저럭 대화가 되는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하면서 극단의 이런저런 잡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고, 짬이 날 때는 작곡을 했다. 거기다 한국어로 시를 써서 더러 보여주기도 해, 시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나는 그런 신이치가 인간적으로도 궁금했고 직업적으로도 궁금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신이치가 갑자기 시다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어찌나 날렵하고 재빠른지 꼭 원숭이 같았다. 그러더니 '우어어 우어'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다른 배우에게 신이치가 왜 그러는지 물어 보았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지 어쩐지 가끔 속이 답답할 때면 나무에 올라가서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내려온다고 했다. 뭐야, 이건. 완전 소설이잖아. 나는 바짝 호기심이 당겼고, 그때부터 혼자 그 시다나무를 '신이치의 나무'라 불렀다. 그리고 '신이치의 나무'란 제목으로 꼭 소설을 한 편 쓰리라 별렀다. 물론 모두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러던 차에 신이치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이치가 일본으로 돌아간 해(정확한지 모르겠는데) 태풍 때 그만 그 시다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수십 년을 한 자리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이튿날부터 나무의 처리 문제를 두고 남편과 나, 그리고 단원들은 전전긍긍하다가 김해시인가 교육청인가에 문의를 했더니 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피해에 해당되니 인력을 배치해서 치워주겠다고 했다. 그래 나무 치우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옥을 짓는 목수라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이 나무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이니 만큼 귀하게 쓰겠구나 여기고 그러기로 말약속을 했다.
 
하지만 막상 나무를 치우자니 허전했다. 그래 단원들과 나무의 큰 둥치를 한 토막 남겨 기념물로 삼기로 의논하고, 나무를 가져가기 전에 살피러 온 사람들에게 두세 번에 걸쳐 설명을 하고 또 당부도 했다. 그 나무의 흔적은 몇 년째 살고 있는 우리들의 기억뿐만 아니라 도요분교를 지을 때 울력이며 찬조로 힘을 보탰다는 도요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람들이 나무를 가지러 왔고, 기념하는 의미로 어쩌고 하는 말에 따른답시고 팔뚝만한 막대기 몇 개를 꽂아놓으려 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옥을 짓고, 소위 나무를 다룬다는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그처럼 무심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큰 둥치를 한 토막 잘라주는 것이 아까웠을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겠다 싶어서, 아예 잎사귀 하나 남기지 말고 깨끗이 쓸어가라고 했다.
 
소설을 쓰기도 전에 사라진 '신이치의 나무'가 있던 자리는 곧 메워졌다. 나무든 사람이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달래던 나는 '신이치의 나무'를 붙들고 근 일 년 동안 씨름을 했다. 신이치가 남기고 간 여러 일화와, 그 나무에 얽힌 기억들을 이리저리 얽고 또 얽어도 소설은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해가 지난 봄에야 겨우 '이치로와 한나절'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얼핏얼핏 들은 신이치의 개인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시다나무를 무화과나무로 대치해서 쓴 '이치로와 한나절'은 그해 아르코문학상을 받았다.
 
이 모두가 바람이 만들어낸 일이라면 나는 도요의 바람에 큰 신세를 졌다. 오월이 저물어가는 초여름의 저녁에 바람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올해는 나니뇨 현상으로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태풍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세찬 바람이 불어 또 한 그루 나무가 쓰러질 때, 나는 다시 또 누구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쓰게 될까. 아직 오지 않은 큰 바람을 향해 부탁한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러니 제발 멈추어다오.




>>조명숙/김해 생림에서 태어남. 김해여고 졸업.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조금씩 도둑><댄싱맘> 등 다수. mbc창작동화대상, 향파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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