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6일 송담서원에서 사충신 향례가 진행되고 있다.

동상동 송담서원 사충신 향례
왜적과 싸우다 숨진 충절 기려

지난달 26일 동상동 송담서원(원장 허선)에서 사충신 향례가 진행됐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최초의 의병장 송빈(1542~1592), 이대형(1543~1592), 김득기(1549~1592), 류식(1552~1592) 등 사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행사다.
 
왜적은 1592년 음력 4월 16일 동래성을 함락한 뒤 다음날 김해부성을 공격했다. 당시 김해부사였던 서례원은 부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때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김해성에 들어가 김해를 지켰다. 이들은 사흘간 성을 지키며 버티다 4월 20일 순국했다.
 
이후 해마다 사충신이 순국한 음력 4월 20일 송담서원에서는 사충신의 위패를 모셔놓고 향례를 봉행해 왔다. 송빈의 13대 종손 송유장 씨는 "임진왜란 당시 김해부사도 도망갔지만 사충신은 끝까지 김해를 지켰다. 다른 지역은 대부분 하루 만에 함락됐지만 김해는 사흘이나 대항하며 진주, 밀양이 왜적과 싸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자랑스럽게 여길 일"이라고 말했다.
 
사충신 향례를 앞두고 오전 9시 30분께부터 경남지역 유림, 사충신 후손 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이 얼추 다 모이자 엄숙한 분위기에서 향례를 관장하는 제관의 이름을 적고 집사들의 역할을 분정(임무를 나누는 것)했다. 올해 향례의 초헌관은 배도석 성균관 전 부관장, 아헌관은 노구현 김해성균관유도회 전 한림지회장, 종헌관은 김일구 김해수로왕릉 숭안전 참봉이 맡았다. 향례를 진행하는 집례는 류동철 김해성균관유도회 지부장, 축은 김경규 김해성균관유도회 전 청년회장이 각각 담당했다. 
 
분정을 마친 유림과 사충신의 후손들은 향례를 진행하기 위해 이동했다. 상절문을 지나 표충사 앞에 선 이들은 엄숙한 분위기로 향례를 지냈다. 향을 피우고 폐백(고인에게 예물로 바치는 비단)을 신위에 올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사충신이 의병장이라는 뜻을 기리는 예포 발사,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이 순서대로 사충신의 제사상에 술을 따르는 헌작례,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초헌관이 먹는 음복례, 축문을 불태우는 망료례 순서로 약 1시간 동안 진행됐다. 향례를 마친 뒤 유림들과 사충신 후손들은 송담서원 마루에서 표충회 총회를 진행했다.
 
유림들과 사충신 후손들은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이 우리나라 의병장의 효시임에도 김해시가 적극적으로 향례에 참여하지 않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류식의 12세손 류재돌 씨는 "사충신은 왜적에 맞서 우리나라를 지킨 훌륭한 분들이다. 임진왜란 의병장의 효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는 적극적으로 향례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원래 초헌관은 김해시장이 맡아서 주관해야 하는데 시장이 오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맡았다"고 아쉬워했다.
 
경남 향토사학자이자 송빈의 후손인 송춘복 씨는 "임진왜란은 의병전쟁이다. 의병들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던 전쟁이다. 사충신 덕분에 김해가 의병의 시원지가 될 수 있었다. 시와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송담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순조임금이 표충사라는 사액(조선시대에 왕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내렸다. 굉장히 중요한 유산이지만 시와 교육기관들은 잘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송빈의 13대 종손 송유장 씨는 "곽재우나 신돌석이 최초의 의병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향례행사만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분들의 넋을 다 달랠 수는 없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 김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더 알릴 수 있게 교과서에 실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해뉴스 /강은지·오진실 인제대 학생인턴 report@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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