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의 패배, 단순한 ‘기능대결’ 결과
문명의 인간 지배설 단순 공상과학 소설

점점 기계화되는 ‘의식’이 더 큰 문제
사람 사이 감정교류 갈수록 단순·직선화

행복한 삶 위해 인문학 생활화 서둘러야
실생활 지혜주며 대중과의 친화 시도 요구
성과주의 앞서 인본주의 교육 제고 필요

얼마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결과는 1-4였다. 문명을 창조한 인간이 문명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를 놓고 세상은 온갖 상상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인공지능과의 시합에서 이세돌이 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세돌의 머리는 하나이고 알파고의 그것은 모든 프로 기사들을 총동원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 사례는 오로지 기능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행기를 만든 인간이 비행기보다 빠를 수 없고, 현미경을 만든 인간이 현미경보다 더 자세히 볼 수 없고, 총을 만든 인간이 총보다 더 강하지 않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알파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이세돌에겐 있고 알파고에겐 없는 것, 그것은 바로 '표정'이었다. 판이 거듭될수록 구겨졌다 펴졌다 하는 이세돌의 얼굴과 달리 알파고의 대리인은 무덤덤했다.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은 천변만화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울고, 화를 내는 것 같아도 실상은 아니고, 배가 고파도 부른 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인간 내면에서의 희로애락을 문명의 그릇에 고스란히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이는 마치 인간이 신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문명이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기우는 단지 공상과학소설의 이야기로 그칠 일이다.
 
문제는 기능 대결의 결과가 아니라, 점점 기계화 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이다. 작금의 현실은 끊임없이 인간을 문명에 길들이려 하고 있다. 인간 또한 존재감을 포기한 채 스스로 노예의 길을 걸으려 한다.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고, 펜으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되고, 길을 묻지 않아도 된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함으로 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 교류는 점점 단순화 되고 직선화 되었다. 통로가 좁아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동물과 달리 생존이 아닌 생활의 공간임에도 인간다움을 방기한 채 문명의 단맛에 흠뻑 젖은 동물족이 늘어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추세라면 언젠가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 교류가 뜸해질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학자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 최고의 경영자로 평가 받은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출시하면서 배경화면에 2개의 엇갈리는 화살표를 등장시켰다. 하나는 과학기술(Technology)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Liberal Arts)이다. 두 화살표는 교차점을 만들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말했다. '인문학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떤 과학기술도 무의미하다'라고. 옳은 말이다. 세계의 석학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접목을 시도해 왔었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하는 것이 인문학의 생활화다. 인문학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과학 없는 인간 사회는 있을 수 있어도 인문적 교양을 상실한 인간 사회는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사회는 이미 동물의 왕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은 유대인 정신분석학자 빅터프랭클 (Victor Frankl)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매일 매일 죽일 사람을 고르던 병사들은 급기야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다. 고민하던 나치는 수용소의 화장실을 없앴다. 그 후 돼지우리처럼 되어버린 수용소 안에서 돼지 같은 죄수를 골라내는 일에 대해 병사들은 무덤덤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체력이나 지능이 뛰어난 자들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깨달은 강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양보하고 나누어줄 줄 알았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로지 먹을 것에만 매달려 다투고 남의 음식을 빼앗아 먹던 사람들은 일찍 병들어 죽거나 먼저 끌려 나가 죽었다.'
 
그렇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지성의 덕분이다.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본능에 대한 제어장치로서의 이성 덕분에 인간은 인간다울 수가 있는 것이고, 생존만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세상을 이끌어가는 모든 이치의 중심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가치의 웩더독(Wag the dog) 현상'을 겪고 있는 지 이미 오래다.
 
과거 그 어느 시대를 돌아보아도 인간이 우선이었던 적이 없었다. 국권 상실, 해방, 건국, 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등 격변의 시대를 이끌었던 모든 담론의 중심에 과연 '인간다움'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는 선진사회의 문턱에 서 있다. 선진사회는 인문학적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이러한 위기의 현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 삶의 가치를 경제성으로 따질 것이 아님에도 문학, 철학, 역사가 비인기학과로 전락되어 인문학을 교양 필수로 하는 이공계 대학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둘째,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행복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인 바, 이를 위한 나눔·관용·이해·동정·배려 같은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 메말라가고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시장경제 논리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산층 기준은 문화이고 우리의 중산층 기준은 경제임을 상기한다면 부끄러울 뿐이다.
 
셋째,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찾아내는 정신 활동이고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문학의 고향은 결국 과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문학의 위기와 더불어 과학기술 또한 위기를 겪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넷째, 문명은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위기는 곧 문명의 위기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결국 앞에서 제시한 인문학의 위기는 허망한 문명사회를 초래할 것이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문명은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해 답을 줄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 어떤 문명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지금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가치의 중심에 인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성과주의 못지않게 인본주의 교육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머지않아 도래 할 미래사회에 대처할 수 있다. 미래사회는 노동을 기계에게 맡기고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사회이리라. 그러함에도 최근 많은 대학이 인문학과를 없애거나 통폐합했다. 이유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대학의 취업기관화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 아닌가. 대학의 목적은 인재양성과 학문연구에 있음에도 오직 대학 그 자체의 생존에만 급급하다니…. 물론 이것이 대학만의 탓은 아니다. 취업을 비롯한 현실적 문제가 심각하고, 대학평가 항목에 인문학과 존치를 위한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교육부 또한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미래를 위한 숙려를 외면한 채 최근에는 오히려 역으로 나아가 인문·사회계열 학과의 축소, 폐지를 골자로 한 '프라임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니 교육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하기야, 가장 비교육적인 정치인이 장관으로 날아온 일까지 있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뿐 아니다. 인문학자들 또한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 세상은 나날이 실용중심주의로 변해 가는데 포용의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지금 현실이 원하는 것은 동반자로서의 인문학임에도 우리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인문학은 대학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 이를 실감케 한다.
 
과거 모 대학에서 통폐합으로 없어진 인문학과의 교수들이 모여 '문화콘텐츠학과'를 처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성공한 사례다.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인정받은 지는 이미 오래다. 현실에 부응해 시의적절한 학과를 탄생시킨 결과 교수들은 자신의 전공을 버리지 않고도 살아남은 것이다. 이처럼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야 실용과 경쟁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있다.
 
이제 인문학은 실생활에 지혜를 주는 폭넓고 접근하기 편한 내용과 방법으로 대중과의 친화를 도모해야만 한다. 불교의 쇠퇴를 막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라고 외친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처럼 말이다.
 
삶에서,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감성은 인간을 이해하게 한다. 때문에 문학, 역사, 철학이 살아 남아야 하고 예술 또한 꽃피워야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간다움의 학문이듯, 문명 또한 삶에서 출발하므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배려가 없는 알파고의 지능은 결코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선사하지 못할 것이다.




>> 이현우/경북대 졸업. 시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문학> 통해 등단. 시집 <오늘 날씨는 우리들 표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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