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성 작가가 흙을 빚어 작은 사람 모형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뜨거운 아스팔트의 열기가 정신까지 녹여버릴 듯한 날씨였다. 마른 흙먼지를 맞으며 상동면 장척로 687-30으로 갔다. 도예가 김영성(56) 씨의 '상동요'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상동요는 흙길과 달리 푸르른 모습이었다. 어른 허리 높이의 울타리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정원이 펼쳐졌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상동요를 깨웠다.


26년 전 상동면에 터 잡고 창작활동 시작
도자기에 생명 불어넣는 일은 소성작업
가마 그을음에 손때와 구슬땀 묻어나

작은 인간과 자연물 형상 도자에 붙여 표현
도예 과거와 현재 잇는 현대적 공존 의미
스위스 조각가 알프레토 자코메티 영향
인간 모습 서러움과 외로움 느낀 자신 대변


"여름이라 나무와 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자라나 밀림이 돼 버렸습니다. 가을이 되면 정리를 해야 합니다."
 
컹컹 '가을'이가 짖는 소리를 들었던지 상동요의 안주인이자 김영성의 부인인 임란숙(53) 씨가 기자를 맞으러 나왔다. 잠시 뒤 김영성도 반가운 얼굴로 따라 나왔다.
 
상동요는 2층짜리 건물로 되어 있었다. 정원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곳이 작업실이었다. 그 옆으로 토가마(장작가마)실과 가스가마실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전시장이 있었다. 2층은 주거공간이었다.
 
상동요의 공간들 중 규모가 가장 큰 작업실에는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작업테이블이 네 개 놓여 있었다. 벽면 찬장에는 아직 소성이 안 된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김영성이 주로 작업을 하는 한 책상 위에는 물레와 흙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작업 방식 중에는 손톱 크기만한 작은 사람 모형이나 동물 모형을 만들어 자기에 붙이는 게 있다. 그래서 한 쪽에는 흙덩이가, 그 옆에는 풀 역할을 할 물에 섞은 흙 반죽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
 
비로소 도자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당연히 소성작업일 것이다. 가마를 다룬다는 것은 불을 다룬다는 것이고, 이것은 도예가에겐 필수불가결의 숙제이기도 할 터. 김영성의 가마를 둘러보니 그의 손때와 구슬땀이 가마의 그을음처럼 묻어 나오는 듯했다.
 
"토가마는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도자기를 빚듯 차근차근 흙을 바르고, 내 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임했더니 힘든 줄 모르고 완성이 되었죠.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유달리 애착이 가는 곳이 토가마실입니다. 작업을 많이 할 때는 일 년에 불을 4번도 올렸습니다. 보통은 1년에 1~2번 올리기도 힘든 실정인데 말이죠."
 
토가마실 옆에는 마른 장작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부지런한 개미처럼 몇 년 치 땔감을 미리 마련해 놓은 모양이었다. 토가마는 길이 8m, 높이 1.5m의 4봉 가마였다. 토가마 옆 작은 방에는 가스가마가 있었다. 가스가마는 0.8루베 크기라고 했다.
 
가스가마 한편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쌓여 있었다. 온도를 재는 용도라고 했다. 김영성은 온도계에 의존하지 않고 소성할 도자와 같은 재질의 흙을 돌에 붙여 온도를 잰다고 했다.
 
김영성은 "작업실은 어수선하니 전시장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가 안내한 전시실은 다도실을 연상시켰다. 낮은 탁자가 공간의 중앙에 길게 자리 잡고 있었고, 넓은 방석이 탁자 옆으로 놓여 있었다. 푹신한 방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임란숙 씨가 김영성의 작품에다 따뜻한 차와 다과를 담아 내왔다.
 

▲ 김영성 작가의 작업실 '상동요' 전경, 작업실 내부, 그가 직접 지은 토가마(사진 위에서부터).

"도예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과 공작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부산시 학생미술경진대회에서 부산시교육감상을 수상하면서 손재주를 인정받기도 했죠.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부산공예고등학교(현 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예 한 길만을 걸어 온 세월이 벌써 38년 정도 되었네요."
 
김영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의 한 기업체에 들어가 도자 완구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다 1년 반 정도 지나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1989년에 부산 해운대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부산이 고향인 그에게 김해에 터를 잡게 된 연유에 대해 물었다.
 
"해운대의 작업실은 지하에 있었어요. 형편이 좋지 않아 지하작업실을 구했었죠. 그러다 물난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학교 선배였던 문운식 화백이 김해로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김해의 도자 공방 대부분은 진례면에 있다. 그런데 그의 공방은 상동면에 있다.
 
"처음 장소를 정할 때 진례를 추천 받았어요. 하지만 도예가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는 가기 싫었습니다. 물론 좋은 영향도 있겠지만, 독창적인 작업으로 자립하고 싶은 욕심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상동면의 부지 150평을 샀다. 그게 벌써 26년 전이다. 부인과 외동아들, 이렇게 셋이 상동요를 함께 꾸려왔다.
 
상동요를 차렸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외로웠다고 했다. 이런 감정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스위스의 조각가 알프레토 자코메티를 동경했습니다. 자코메티는 길고 가느다란 인체를 표현한 조각품으로 유명합니다. 영혼만 남기고 살을 다 떼어낸 인간의 본질을 상징하는 작품들입니다. 저도 인간 군상과 자연과의 관계를, 작은 인간과 자연물의 형상을 도자에 붙이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와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저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대변합니다. 외로움에 사무쳐 밤하늘로 시선을 던졌을 때 보았던 상동의 별들을 작품에 담기도 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시장에 있는 그의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전통자기와 현대적인 도자들이 섞여 있었다. 전통 차 사발인데 귀가 붙어있기도 했고, 옛 화병에 소인국에서 온 듯한 인간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했다. 문득 다과상 옆에 놓인 작은 함 모양의 도자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15cm 남짓 길이의 작은 함이었다. 뚜껑에는 사람 셋과 강아지 한 마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들에서는 홀로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 김영성 작가가 만든 다목적 함.

"저는 '공존'을 주제로 작업을 합니다. 전통자기에 작은 모형을 붙여 현대적인 느낌을 내는 것 또한 도예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공존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을 이어놓는 건 인간이 역사를 일구고 생명을 이어 온 게 공존 때문에 가능하다는 개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찬찬히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더니, 바람이 꼬리를 물고 물결치고 있었고, 여러 조각의 구름들이 서로 힘을 보태어 도자기를 받치고 있었다. 널찍한 도자 위에서는 별들이 서로를 이으며 우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삼라만상이 이런 식으로 외로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김해뉴스 /강보금 기자 amond@gimhaenews.co.kr


≫ 김영성/(사)한국미협이사, 경남미협공예분과위원장, 경성도예가회 회원, 경남도예가회, 부산도예가회, 한국문화상품디자인협회 회원, 부산, 일본 후쿠오카 등 개인전 9회.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