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남 작가가 '나미요'에서 작업을 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백일몽을 꾸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조그만 소녀가 갓길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소녀의 얼굴과 목에는 알록달록한 혹들이 붙어 있었다. 소녀가 노란색 혹을 하나 떼어내자 슬픔이 사라졌다. 소녀가 파란색 혹을 떼어내자 고독이 사그라들었다. 소녀가 빨간색 혹을 떼어냈다. 소녀는 더 이상 시린 그리움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김해의 낮 최고기온이 35.7도를 기록하던 날, 한림면의 한 길가에서 김정남(37) 작가의 공방 '나미요'를 찾다가 잠시 백일몽을 꾼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김 작가는 백일몽 속의 소녀가 혹을 떼어내듯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떼어내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중구난방 이질감 느껴지는 각종 소품들
여러 작가 손길 간 듯 공통성 없어 이색

재료·형태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시도
우울증 등 많은 인생 경험 작품에 표현

전시 마치면 모든 활동 자유롭게 중단
휴식 동안 커진 잠재적 욕구 ‘활동 원동력’


 

▲ '나미요' 전경(위 사진)과 선반에 쌓여 있는 작품들.

김정남의 작업실 '나미요'는 한림로 401번길에 있었다. 길 한복판에 붉은 갈색의 컨테이너가 서 있었다. 그곳이 '나미요'였다. 컨테이너 두 개를 붙인 작업공간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김정남이 반색을 하며 기자를 맞았다.
 
첫 번째 컨테이너에는 흙 반죽기와 가스가마, 전기가마가 있었다. 긴 컨테이너 안쪽에 자리 잡은 가스가마는 굴속에 웅크린 짐승 같았다. 김정남은 컨테이너의 공간에 꼭 맞게 0.5㎥의 가마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 옆에는 전기가마와 철제 선반이 호위무사처럼 서 있었다.
 
철제 선반 위에서는 수많은 눈들이 방문객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남이 빚은 인형들이었다. "지켜보는 눈들이 많네요." "안쪽 작업실에 가면 더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는 작은 소품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 앞에는 구 모양의 도자 작품이 모빌처럼 걸려 있었다. 선반에는 손바닥 크기의 어린이 모양 도자인형들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컵, 접시, 수저 등 흙으로 빚은 식기가 가득 쌓여 있었다. 선반 아래 바닥에는 몽환적인 색감을 마블링기법으로 표현한 어른 무릎 높이의 작품이 세워져 있었다.
 
김정남은 자신의 작업실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자신의 작업 방식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 김정남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

"개인전을 열면 어떤 관람객은 여러 명의 작가가 공동전시회를 하는 것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어요. 그만큼 제 작업 방식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거죠. 저의 작업 방식에서 핵심은 생활과 감정 속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재료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많은 시도를 하는 편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김정남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작가의 당시 감정상태와 상황 혹은 그가 겪었던 경험이 녹아 있다. '꿈의 조각'은 각기 다른 크기의 구 모양 도자 200여 개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넣어 공중에 매달아 둔 것이다. 그가 상상한 세계나 꿈속의 장면들을 표현한 것이다. '몽상'이라는 작품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의 모습을 변형시킨 작품이다. 그는 두 번째 개인전 '주르륵, 비인지 물인지 눈물인지'에서는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작은 인형들을 선보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당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눈물받이를 들고 자신을 위로하는 작은 사람들을 상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활 속에서 영감을 얻기 때문에 아이디어에 한계가 없다는 게 저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징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건 거꾸로 단점이 되기도 하죠. 작업을 할 때는 모든 에너지를 다 써서 작업에만 몰두합니다. 대신 전시를 마치고 나면 저 자신을 놓아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흙을 자유롭게 만지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잘 노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김정남은 여가생활이 작품 활동의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했다.
 
"작업을 안 할 때는 산으로 들로 여행을 다닙니다. 노는 동안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같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추억과 느낌, 감정이 작품으로 탄생합니다. 내면에서 생성된 관념들을 표현하고 싶은 게 저의 작품 철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정남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혹을 떼어내듯이 정신의 한 부분을 덜어낸 게 자신의 작품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품으로 표현하고 나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는 그래서 작업 활동을 멈출 수 없다며 웃었다.
 
나미요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중구난방 이질감이 느껴졌던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김정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새롭게 느껴졌다. 모든 작품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모든 작품이 그의 슬픔, 기쁨, 우울, 즐거움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미요는 마치 거대한 김정남의 내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뉴스 /강보금 기자 amond@gimhaenews.co.kr


≫김정남 / 2009년 울산미술대전·성산미술대전 공예부문 특선, 2010년 김해미술대전 우수상, 대한민국관광기념품 창작부문 입선 등 다수의 상 수상, 내년 김해문화의전당 '뉴페이스 인 김해'전 작가로 선정.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